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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강 Aug 07. 2020

너무 무리하고 있는 거야.

과도한 여행 일정으로도 패닉은 찾아왔다.

미국에 온 지 9년 만이었다.

이번 한국 방문은 그동안 칩거하고 살던 내가 어떤 계기로 (이 일은 다음 기회에 써볼 생각이다.) 다시 세상과 만나기로 마음먹으면서 이루어진 방문이었다. 오랜만의 방문이다 보니 일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빡빡해져 갔고 무리한 일정이 되어가고 있었다. 


스트레스는 나쁜 일로만 오는 게 아니다. 아무리 즐겁고 흥분된 일이라도 스트레스는 있게 마련이고 나의 쉼 없이 진행된 두 주간의 여행 일정은 심신의 에너지를 다 태워버리고 나를 넉아웃 시키고 말았다.




먼저 가장 친한 친구 두 명에게 나의 방한 계획을 알렸다. 두 사람 모두 그동안의 소원함을 보상해주려고 그러는지 정말 내 일처럼 도와주었다. 한 사람은 아예 자신의 집에서 묵으라고 안방을 내어주기도 했고 나의 주요 방한 일정을 주선해주기도 했다. 그렇게 일정이 잡혀가는 가운데 내가 만나기로 한 사람들의 수는 시간이 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함께 미국 연수를 왔던 친구들과의 만남 일정이 잡히고 나니, 그들 중 누군가가 나와 함께 일했던 후배가 날 꼭 만나길 원한다는 소식을 준다. "그래, 못 만날 것도 없지" 싶어서 후배와의 일정을 잡고 나니 후배의 상관인 내 졸업 동기를 안 만난다는 것도 좀 그렇다. 하는 수없이 졸업 동기와의 약속을 잡고 나니, 다른 졸업 동기들과 함께 게스트하우스에서 일박이일을 보내자고 한다. 


두 주간의 한국 일정은 도착 첫날부터 바쁘게 돌아갔다.

아니, 비행기 삯을 아끼느라 직항이 아닌 토론토 경유를 하다 보니 출발부터 피로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도착 후 첫날부터 형제들과의 만남, 그 이튿날 김해의 시부모님 방문, 올라오면서 같이 대학원 공부를 했던 동료들과의 만남 등등 계속 이어지는 일정은 줄기는커녕 점점 늘어만 갔다.


그 모든 일정을 정말로 기쁘고 반가운 마음으로 보낸 어느 날, 두 주간 방한 일정의 마무리 즈음이었다.

전날 나는 서울역 근처의 어느 호텔에서 예전의 성당 레지오 팀원이었던 언니 두 분과 함께 묵었다. 

그동안의 회포를 풀려면 호텔 숙박이 최고일 것이라고 한 분의 센스 있는 딸이 예약해준 거였다. 

아줌마 셋이 근사한 호텔방에 묵었으니 안 봐도 비디오 아닌가?

우리는 쾌적한 호텔방에서 거의 밤을 하얗게 새우면서 지난 세월과 정담을 나누었다.


다음날 아침 샤워를 마친 나는 "네가 무슨 연예인이냐?"라는 지청구를 들으면서 명동의 어느 뷔페식당으로 향했다. 아점을 같이 하기로 한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9년 만의 친구들과의 만남은 서너 시간으로는 너무 아쉬웠다. 

하지만 나는 그날 늦은 오후에 만나 뵙기로 한 은사님의 연구소가 있는 여의도로 향해야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어진 은사님과 여러 선생님들과의 만남, 그리고 또 그들과의 저녁식사.

그날 나는 밤 9시가 넘어서야 누군가의 승용차를 얻어 타고 수원의 동생집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연일 이어진 강행군으로 무척 피곤했다. 즐거운 시간들이었지만 나는 연일 시차와 늦게까지 이어진 일정으로 밤잠을 설치고 있었고 낮에는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있었다. 

안 피곤하다면 그것이 이상할 터였다.


그때였다. 다시 죽을 것만 같은 느낌이 덮쳐왔다. 언젠가 겪었던 바로 그것, 그 느낌이었다.

동생과 이야기하다 말고 나는 얼른 자리에 누웠다. 느닷없는 나의 증상에 놀란 동생이 늦은 밤 여러 곳을 헤맨 끝에 청심환과 마시는 신경안정제를 사 왔다.

증세가 심해지면 한밤중이라도 응급실에 가기로 마음먹고 누워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다행히 호흡이 도움이 되었는지 까무룩 잠이 들었고 이른 아침 수원의 어느 종합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나는 한국 의료보험이 없으니 비용도 비싸고 절차도 복잡했지만 두어 시간 뒤에 만난 젊은 여의사는 한두 가지 검사 결과를 쳐다보면서 미국으로 돌아가는 대로 심장 전문의를 만나보라고했다.

"만약 심장검사에서 괜찮다고 나오면 패닉일 가능성이 있지만..."이라고 웅얼거리듯 덧붙이면서.


미국에 돌아온 나는 두어 달에 걸친 예약과 검사를 해나갔다. 

심장전문의를 만나고 그의 처방대로 심장초음파, 심장 CT 검사, 운동부하검사, 그리고 방사능 물질을 주사해서 심장 내 혈관의 흐름을 검사하는 이름 모를 검사 등.

결과는 내 심장이 썩 좋은 상태는 아니지만 지금 당장 무슨 시술을 받아야 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 

즉 협심증이나 뭐 그런 병은 아니라는거다.


그렇다면? 내가 겪은 증상의 진단은?

한국의 의사가 진단한 대로, 심부전증 또는 협심증이 아닌 패닉이었던것까??.

그때는 잘 몰랐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내 몸과 마음은 너무 지쳤노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던 거다.

흥분된 만남과 즐거운 대화일지라도, 쉼 없이 이어지면 그것은 해가 된다는 것을 일러주고 있었던 거다.


우리 몸과 마음의 에너지는 한계가 있어서 비워지면 다시 채워져야 한다.

그리고 다시 채워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휴식이 필요하다.

쉼 없이 내달린 두 주간의 흥분된 일정 속에 지친 내 몸과 마음은, 어느 순간,

 "네가 너무 무리하고 있노라"라고 경고하고 있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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