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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강 Aug 15. 2020

나, 힘들어서 그랬어.

칩거 9년 만에 세상과 다시 만나다.

미국 이민후 힘들었던 시간 동안, 나는 집안으로 꽁꽁 숨어들어버렸다. 나도 내 상황을 이해하기 힘든데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싶었고, 어려움에 빠진 상처투성이인 나를 드러내는 게 너무 자존심이 상했다. 

그냥 그런 결정을 한 나를 받아들이고 이민자로서의 또 다른 나로 살아가기로 했다. 

45년간 나를 지탱해준 사회적 역할과 관계는 태평양을 건너오던 때 바닷속에 던져버렸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야 허둥지둥하는 낯선 나를 이해하고 받아 들 일수 있었다. 

하지만 낯선 나라에서의 낯선 나는 늘 다른 사람의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고 외로웠다.

익숙했던 세상과 등진채, 새로운 나로 살아가던 어느날,

내가 낯선 나에게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가던 때, 하지만 여전히 많이 외로웠던 때, 

옛 친구들이 운명처럼 찾아왔고 나는 용기를 내어 그들과 다시 만났다. 

그들과의 만남은 내가 다시 과거의 나와 만나고 온전한 나로 되살아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서리에서 장을 보고 있는데 어딘가에서 전화가 왔다. 낯선 번호였다. 받을지 말지 잠시 망설이다가 받은 전화를 통해 낯익은 목소리가 소리를 지른다. 

"어머 머머, 선생님 전화가 맞네요, 저 000이에요."

내가 살던 관악구의 복지관에서 관장으로 일하고 있던 옛 동료의 목소리이다.

장보다 말고 느닷없는 친구의 전화에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나에게 친구는 내 연락처를 찾는 게 너무 어려웠다는 하소연을 쏟아낸다. 나를 알만한 모든 사람에게 전화를 했는데도 알 수가 없어서 대학 동문회 사람들에게까지 연락을 했노라고. 

그러면서 조만간 미국의 동부를 방문하는데 만날 수 있는지를 묻는다.

너무 갑작스러운 전화였지만 외로움과 향수병에 늘 젖어있던 나는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 없이 선뜻 그러자고 약속을 한다.


그로부터 딱 11년 전.

나는 복지관 동료들과 미국 연수를 왔었다. 

그때 한국은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사회복지계에도 불어서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IMF의 어려움을 가까스로 추스르고 나니 서울시장은 모든 사회복지기관을 평가하겠다고 나섰다. 회계의 투명성과 효율적 운영에 목적을 두는 평가는 얼마든지 환영이었지만 서울시는 평가를 통해 줄 세우기를 하고, 같은 양의 예산을 평가순으로 재배분하는 조삼모사 같은 얄팍한 짓거리를 했다. 

그 폐해는 고스란히 모든 사회복지기관과 그들의 클라이언트들에게 전달되었다. 복지관의 운영을 책임지고 있던 우리들은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평가제도의 도입이 절실했다.

IMF 실직 노숙 문제 해결을 위해 의기투합했던 우리들은 다시 모였다. 

그리고 제대로 된 평가제도를 배워오겠노라 공동모금회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렇게 일곱 명의 멤버가 미국에 왔었다.


십이삼일간의 짧은 일정 중에 만난 미국은 꽤 괜찮아 보였다. 

아니, 누구에게라도 여행자의 눈에 비친 외국은 숨 막히는 일상으로부터의 도피처로 둔갑하지않는가. 

게다가 거기서 만난 중학교 은사님은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여기 와서도 공부를 잘하니 걱정 안 해도 된다."라고 하셨다. 내 아이들이 공부를 어느정도한다는 사실만으로 그분의 뒤이어진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민 1세대인 부모들이야 많이 고생스럽겠지만..."


그렇게 내 삶의 행로가 180도 달라졌다. 미국 연수 후 미국으로 이사를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나는 그때 사회복지관 경력자였고 그를 뒷받침하기 위한 공부도 어지간히 마친 상태였다. 

이제 한창 빛을 발하며 멋지게 일할 나이, 45살 때였다. 

삶은 가끔 너무 어처구니없는 계기로 방향을 틀어 짐작할 수가 없나 보다.

나는 나의 미국 이민이 너무나 생뚱맞은 결정이라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가 어려웠다. 

어떤 이는 늦은 나이에 무슨 유학이냐고 했고, 어떤 이는 무모한 결정이라고 걱정해주었다.


그들의 걱정이 현실이 되었다. 나는 내가 그렇게 영어를 못하는 줄 몰랐다. 아니, 영어 정도는 쉽게 적응해나가리라 가볍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영어는 말할 것도 없고 일상적인 것에서부터 하나하나 배워나가야 했다.

이민 초기에 저지른 실수들을 하나로 묶으면 책 한 권은 될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실수들을 이어나갔다.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을 해서 먹고사느냐였다. 그동안 해오던 일들은 언어장벽과 미국에서의 크레딧이 없어서 접근할 수조차 없었다. 우리도 다른 이민자들처럼 바닥부터 해야 했다.

남편은 가능한 일부터 경험해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고 11학년, 중 7학년으로 새로 시작한 아이들의 학교생활을 지원하는데 집중하기로 했다. 

아이들을 차로 실어 나르고 필요로 하는 것을 함께 준비하고,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격려하고 함께 울면서.


먹고사는 문제만큼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의료보험이었다. 한국에서도 알레르기를 비롯해서 잔병치레를 자주 했던 나에게 있어 살인적 의료비의 미국에서 무보험자로 산다는 것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맹장 수술하는데  8천 불이 들었다는 둥, 엠블런스 타고 병원 가는 비용이 5백 불 들었다는 등의 이야기는 나를 잔뜩 주눅 들게 했다. 

한번 아프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지?, 혹시 가족 중 누가 중병에라도 걸린다면?  

그렇다고 몇백 불씩 하는 개인 의료보험을 덜컥 가입할 수도 없었다. 겨우 아파트 하나 달랑 팔아 들고 온 쌈짓돈을 어마 무시한 의료보험료로 쏟아부을 수는 없지 않나..

남편과 아이들이 일터로, 학교로 나가고 혼자 남은 뒤,  기도하려고 십자고상 앞에  꿇어앉아 흘렸던 눈물은 무모한 이민에 대한 자책과 두려움의 눈물이었다.

그때 나는 기댈 언덕이 전혀 없는 광야에 내 던져진 것 같은 막막함과 두려움을 느꼈다. 

나의 전 생애를 통해 처음 겪는 막막함이고 고통이었다.


그러나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게 되어있는 법. 

아이들은 눈에 띄게 적응해나갔고 그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었다. 

남편의 도전적인 성격도 빛을 발해 자력으로 비즈니스를 셋업하고 서서히 자리를 잡아 나갔다. 

점점 생활도 안정이 되어나갔다. 

그러는 중에 나도 드디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비영리 사회복지조직의 사회복지사로 일을 했다면 미국에서는 영리 노인케어시설의 오너가 되었다. 

이름하여 Assisted Living이다. 한국으로 치면 노인생활시설 또는 노인그룹홈 정도 될 것 같다. 

비즈니스 마인드로 운영을 해야 하는 시설이지만 노인을 케어한다는 근본적인 측면에서는 내가 그동안 해왔던 일과 같은 범주의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일을 시작하면서 바닥을 쳤던 나의 자존감도 조금씩 회복이 되어나갔다.


전화가 온 것은 그러던 중이었다. 가까스로 좌절을 이겨나가고 있던 때.

내가 미국 연수를 왔던 때로부터 딱 10년이 되던 때, 현역으로 있던 그들이 다시 미국 연수를 온 것이다. 

열몇명의 그들은 짧은 일정 중에 우리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그들 중에는 동료 관장들도 몇 있었고 교수, 공동모금회 직원뿐이 아니라 나의 부하직원으로 있다가 현재는 어느 복지관 관장으로 성장한 후배도 있었다.


반가운 마음과 다시 세상에 내 존재를 드러내는 것에 대한 부담감의 양가감정을 가지고 그들을 맞았다.

저녁식사는 그릴로 준비했다. 뭘 어찌해야 할지 몰라하는 나를 대신해서 남편은 코스코에 가서 스테이크와 새우. 버섯, 옥수수 등을 사 오고 와인을 준비했다. 그리고 뒷 덱에서 고기를 굽고 먹으며 십 년 가까운 공백을 훌쩍 뛰어넘는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러던 중에 나눈 대화.


동료 : "아니, 어떻게 그렇게도 소식을 끊고 지내셨어요? 아무도 연락처를 아는 사람들이 없더라고요.

          연락처 수소문하느라 엄청 고생했어요. 왜 그러셨어요???  도대체??"

나     : "........ 음.. 나, 힘들어서 그랬어.... 힘든데 안 힘들다고 하기도 그렇고, 힘들다고 하기도 그렇고..."

동료와 모두들 :.......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너무도 솔직한 나의 대답에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그들은 그 한마디로 나의 지난 세월을 충분히 이해한 것 같았다. 

눈물과 어려움으로 얼룩진 나의 지난한 세월을.

모두가 입을 다문 조용한 분위기 속, 유펜에서 유학을 했다는 젊은 교수 한분은 이런 말로 나의 말을 이어갔다.

"나는 유학하는 동안 '생각'만 하고 '느끼기'는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었어요. 그래서 견딜 수 있었죠...."


그러자 한두 사람이 눈시울을 붉히며 나를 허그하는 거였다.

아마도 나의 솔직한 말 한마디가 거기 모인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의 빗장을 열게 한 것 같았다.

진솔한 감정과 허심탄회함은 전염이 된다고 했던가?!

인솔의 책임을 맡았던 이는 자신의 어깨 위에 얹힌 사람들의 기대와 고단함에, 나의 고단함이 뒤섞여 눈물을 보였고, 또 어떤 이는 미국에서 유학 중인 딸이 공부에 쫓겨, 미국에 온 엄마조차 만나러 올 수 없는 안타까움이 나에 대한  안타까움과 뒤범벅이 되어 눈물을 보였다. 


"힘들어서 그랬어."라는 나의 한마디는 거기 모인 사람들이 마음의 겉옷을 벗고 참만남을 가질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모닥불가에 둘러앉아 밤이 늦도록 웃음과 위로의 특별한 시간을 나눌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세상에 나왔다. 

힘들었었노라 고백한 뒤의 나는 감출 것도, 아닌척할 것도 없었다. 

지금은 다른 길을 선택한 내 삶의 고단함도, 그들과 다른 모습의 성과도, 담담하게 페북에 올리며 지난날의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살아가고 있다. 

게다가 그들과의 만남 이후에는 일이 년에 한 번씩 한국을 방문해서 반가운 옛 친구 들을 만나는 삶의 호사를 누리고 있다.


가끔 생각해본다. 

만약 그들의 방문이 없었다면 나는 여전히 그들과, 아니 예전의 나와 단절한 채 이곳에서 낯선 나로 외롭게 살아가고 있을까? 

아니면, 고단함과 외로움에 지쳐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을까?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그들의 노크에 마음의 빗장을 열었고, 나는 내 젊은 날의 친구들과 지금까지도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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