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
사람들이 "미국에는 왜 오셨어요?"라고 물으면 나는 분명하게 대답할 거리를 못 찾고 우물쭈물했었다.
아이들을 위해서 온 것도 같은데 꼭 그것만은 아닌 것 같고, 돌파구가 필요했던 남편의 비즈니스 때문인 것 같기도 한데 또 그것만은 아닌듯하고, 아니 내가 "가보는 게 어떨까?"하고 제안했으니 내가 이민의 시작 버튼을 누른 거였나?? 생각해보니 그런 것도 같다. 하지만 다시 곰곰 생각해보니 정말 어쩌다 보니 미국에 오게 된 것 같다. 살면서 가졌던 이러저러한 인연과 원인이 얽히고설켜서 만들어진 결과, 서울생활을 접고 '어쩌다 보니 미국 생활'을 하고 있는 거다. 지금.
Johnson 아저씨라고 계셨다.
공군 기술장교였던 아버지가 미국 유학 중에 알게 된 분이시라 했다. 한국전쟁 후 공군의 기술력 확보를 위해 몇몇 장교들이 선발되어 미국 유학을 다녀왔고 아버지는 그 유학 중에 존슨 아저씨를 만났다. 미 공군 장교로 아버지와는 교관과 학생의 관계였는지 아니면 그냥 기술협력관계였는지 많이 어렸던 나는 잘 모른다
내가 아는 '존슨 아저씨'는 우리 집으로 매달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배달되게 해 주셨던 분이었고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스웨덴, 덴마크 같은 나라에서나 사용할 것 같은 두툼한 손가락장갑을 우리들 숫자대로 보내주시던 분이셨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실렸던 러시아 황실에서 사용했다는 금세공품의 그 정교함과 사하라 사막과 미국의 광활한 대자연의 모습을 보면서 십대의 나는 세상은 참 넓고도 멋진 곳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 존슨 아저씨가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우리가 부산에 살고 있던 때, 그러니까 내가 중3 또는 고1일 때였나? 잘 기억이 나진 않는다.
존슨 아저씨 부부는 요트를 타고 두 부부가 세계여행 중이라 했다. 그때만해도 우리에겐 꿈같은 이야기였다.
부산항에 들른 아저씨 부부는 아버지와 짧은 해후를 하셨고 그분들을 만나고 오신 부모님 손에는 우리에게 주라고 건네준 빨간 사과가 한아름 들려있었다.
그 사과는.. 흠, 뭐랄까 그때 한국에서 나는 홍옥, 국광같은 품종의 사과가 아니었다. 유난히 빨갛고 아삭거리는 맛이 조금 낯설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Honey crispy나 Pink lady정도 되었던가보다.
부산항에 들린 존슨 아저씨 부부는 미처 준비하지 못한 선물 대신 자신들의 식량 중 일부를 선물한 것이었지만 그 사과의 맛은 나에게 실재하는 더 넓은 낯선 세상을 느끼게 해 주었다.
대학 3학년 때였다.
한 연구소에 나와 대학원생 한 명이 조교로 일을 하고 있었다. 대학원생은 석사학위를 마치면 미국으로 유학을 가기로 이미 모든 절차를 마쳐놓은 상태였다.
어느 날 교수님이 나를 부르셨다.
"자네는 진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혹시 유학을 해볼 생각은 없나? 집안 형편은 어떤가? 부모님이 지원해주실 수 있을 것 같나?"
매 학기마다 등록금이 마련될 수 있을지 없을지 몰라 전전긍긍해야 했던 나는 고개를 떨구고 어렵게 대답했다.
" 졸업하면 우선 취직을 해야 합니다..."
교수님은 그러냐고 다시 특유의 쾌활한 목소리로 바꾸어 대답하셨지만 입술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떨군 나는 울음이 터져 나오려고 하는 것을 애써 참아야 했다.
나도 대학원 선배처럼 유학 가서 공부하고 싶었다. 그동안 배운 사회복지 이론들은 모두 미국에서 유학한 교수님들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교수님들의 가르침 속에 녹아있던 서구의 앞선 학문의 세계에 접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가난한 나에겐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나의 이루지 못한 꿈이었다.
넓고도 낯선 세상에 대한 동경과 이루지 못한 꿈이 나의 미국살이를 추동한 것은 아니었을까?
살아온대로 살면 큰 오류 없이 평이하게 살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행을 택한 것은 아마도 이런 내 삶의 기저에 깔려있던 작은 인연과 말들이 시공을 떠돌다 어느 순간 하나의 에너지로 뭉쳐져 나를 이끌었던 것은 아닐까?
아이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고 싶은 열망과, 내 어린날의 동경과, 이루지 못한 꿈들, 그리고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는 나를 극복하고 싶은 바람들,
이 모든 것의 총합이 나를 이리로 이끌었나 보다.
해서 누군가가 "왜 이곳으로 오셨소?"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겠다.
"어쩌다가 이리되었소이다.ㅎㅎㅎ"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