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을 나온 암탉처럼 우리 집 검정 닭이 알을 품고 싶어 한다.
우리 집 닭장의 닭들은 무정란을 낳는다. 닭 장 안에 수탉이 없기 때문이다.
이곳 카우니의 규정으로는 '꼬끼오'하며 큰소리로 홰를 치는 수탉은 못 키우게 되어 있다.
아쉽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이런 이유로 우리 집 닭들은 알을 품을 필요도 없고 실제로 거의 알을 품지 않는다.
들리는 말로는 유전자 조작으로 알을 품으려고 하는 본능을 닭들에게서 지워버렸다고도 한다.
그저 "너희들은 알만 낳아라", 병아리는 부화기로 인간인 우리가 "만들어낼 테니까"라는 소리이다.
그런데 이변이 생겼다.
닭장안 유일한 검정 닭 한 마리가 어느 날부터인가 알을 품기 시작했다.
다른 녀석들은 알 낳을 때에만 들어가는 산란통에 하루 종일 들어가 있다. "어, 무슨 일이지? 하루 종일 있네?"
조심스레 들어가 녀석의 엉덩이 밑을 뒤져보면 따뜻해져 있는 알들이 두어 개 놓여있다.
녀석은 그곳에서 깨지 못할 알들을 품느라 하루 종일 잘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다.
그런 녀석을 난감한 마음으로 쳐다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짠해져 온다.
"그래, 너도 알이 품고 싶은 거구나...."동화 속 암탉 잎싹처럼...
<마당을 나온 암탉>은 황선미 씨의 장편 동화다. 동화라는 장르에 아동문고로 나왔으니 아이들 동화임에 분명하지만 읽을 때마다 이건 아이들보다 철없는 어른들, 또는 겉늙어가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늘 나 자신을 겉 늙은이라고 느끼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 동화는 읽을 때마다 울림이 다르다.
알을 낳는 것이 숙명인 암탉이 닭장이 아닌 마당을 꿈꾼다.
마당은 자신이 낳은 알을 품어서 병아리를 깰 수 있고 병아리를 키우는 어미닭으로서의 삶이 있기 때문이다.
이루지 못할 소망에 식음을 전폐하던 암탉은 시름시름 앓다가 폐닭 신세가 되어 결국 닭장을 나오게 되지만 헛간이 있는 마당이 아닌 갈대숲에서 살게 된다.
헛간의 동물들이 폐닭으로 버려진 암탉을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역시 헛간의 외도톨이였던 청둥오리와 뽀얀 오리가 낳은 알을 암탉은 제 알 인양 품는다.
그것이 누구의 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품는 행위'는 곧 '어미의 행위'이고 아기는 어미의 품는 행위를 통해 태어나고 자라는 것이므로.
그러던 어느 날, 알을 낳은 뽀얀 오리가 족제비에게 잡아먹히듯이, 청둥오리 역시 제 알을 품고 있는 암탉 잎싹과 자신의 알을 지키다가 족제비의 먹이가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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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태어난 초록머리 아기 청둥오리는 암탉의 온 삶의 의미가 된다.
둘은 무리로 들어오라는 집오리들의 강권도 뿌리치고, 호시탐탐 엿보는 족제비의 위협도 피하면서 저수지 주변에서 숨죽여 살아간다. 암탉 잎싹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곳에서지만 알을 품고 까는 소망을 이룬 것이다.
행복한 시간이 지나고, 다 자란 초록머리는 저수지를 찾아 돌아온 청둥오리 무리에 합류하고 싶어 한다.
자신 역시 그들 중의 하나여야 함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암탉 잎싹은 자신이 품어 키워 낸 초록머리가 자신을 떠나는 것이 숙명임을 알고 초록머리 다리에 묶인 끈을 밤새워 끊어준다. 시간이 다하면 사랑하는 자식일지라도 품에서 내어놓아야 함을 아는 다른 어미들처럼.
그리고 초록머리는 청둥오리 무리의 젊은 파수꾼이 되어 잎싹을 떠난다.
초록머리를 떠나보낸 잎싹은 어느 날 문득 비쩍 마른 족제비 역시 눈도 못 뜬 어린것들의 어미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생의 소임으로 스스로 족제비의 먹이가 되어주기로 한다.
늙고 마른 자신의 몸이 추운 날씨에 굶주린 그 어린것들의 먹이가 될 것임을 알기에.
그렇게 함으로써 잎싹은 떠나보낸 초록머리처럼 훨훨 날고 싶었던 생의 마지막 소망을 죽음으로써 이루어낸다.
암탉 잎싹의 소망은, 자신이 낳은 알을 품어 병아리를 키우면서 사는 삶이었다.
하지만 잎싹의 현실은 늘 찬바람 불고 비 들이치고 외롭고 위험한 가장자리의 삶이었다.
그 외롭고 위험한 가장자리의 삶은 암탉 스스로 선택한 삶이다. 잎싹이 삶의 소망을 놓지 않았기에 선택한 그곳에서나마 알을 품고 병아리를 키우는 삶을 이룰 수가 있었다.
더나아가 그런 고난 중에 키워낸 청둥오리가 곁을 떠나 날아가는 숙명적 이별도 감당할 만큼 큰마음이 될 수 있었고 결국에는 자신의 몸을 내어주고 죽음으로서 날아오르는 궁극적 소망을 이루어낸다.
아무리 동화 속 이야기이지만 그 삶의 깊이가 너무 깊어 가늠하기 어렵다.
게다가 동화 속 삶과 죽음의 순환이 너무 처연하다. 처연하다 못해 숭고하다.
잎싹, 청둥오리 나그네, 초록머리, 족제비는 어떤 인연으로 얽히는가?
알을 낳은 청둥오리는 족제비의 먹이가 되고, 청둥오리 나그네의 죽음으로 지켜진 잎싹과 초록머리는 그 죽음을 디디고 삶을 이어가고, 종래에는 초록머리를 살리기 위해 잎싹이 족제비에게 먹힘으로써 삶들은 연결된다.
잎싹의 죽음은 종결적 죽음이 아니다. 잎싹이 죽음으로써 족제비 새끼들의 삶은 이어진다.
이것은 삶과 죽음의 순환적 인연이며 생명의 순리 이리라.
오늘도 우리 집 검정 닭은 알을 품고 있다.
하지만 녀석이 알고 있을까?? 품고 있는 알들이 생명을 품은 알이란 것을?
그렇다. 어제부터 품고 있는 알들은 삼십여분이나 떨어져 있는 농장에 가서 얻어온 유정란이다.
배고픈 것도, 목마른 것도 참아가며 품고 있는 모습이 동화 속 암탉 잎싹을 보는 것 같다.
유전적 변이를 거부한 우리 집 검정 닭도 잎싹 같은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 소망을 끝내 이루어 잎싹처럼 병아리들을 품에 안을 수 있을까?
제가 낳은 알인 듯, 또는 누구의 알인지는 상관없이 네 개의 알 위에 온몸을 부풀려 덮고서 요지부동으로 앉아있는 모습에서 나는 작은 감동을 받는다.
그리고 나는 감동스러운 그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면서 잎싹이 품었던 소망이 나에게도 있었는지,
있었다면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잠시 생각해본다.
부디 검정 닭이 다른 녀석들의 훼방에도 굴하지 않고 알들을 잘 지켜내고 품어서 병아리가 깨고 나오는 멋진 삶의 소명을 다해줄 것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