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어린것들에겐 좋은 환경이 필요하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모두 타고난 성격과 특성이 있지만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키워지는가도 선천적 특성만큼이나 중요한듯하다. '세상은 그런대로 안전하고 살만하다.'라고 어린것들이 느끼면서 자라나 갈 때 그들은 그 생명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커 나가는 것 같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그렇지 못할 때, 어린 생명들은 무엇인가가 왜곡되었거나 불편한 모습으로 자라고 커나간다. 어린 생명들이 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부적절한 환경에서 자라면서 상처 받는 모습을 볼 때 나는 아픔을 느낀다.
더더군다나 내가 그런 환경을 만든 당사자라면?
십수 년 전, 좁은 아파트에서 병아리를 키운 적이 있다.
둘째 아이가 학교 앞에서 파는 병아리를 사 온 거였는데 어지간히 무심한 나는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잔소리를 했을 뿐 그것을 한 생명으로 생각하고 들여다보지 않았다.
병아리와 함께 얻어 온 모이도 그 녀석이 살아있는 동안 줄 수 있는 정도의 이삼일 치.
그런데 "어라?? 얘 좀 봐라?" 병아리는 이삼일이 지나도 죽지 않았다. 그러자 당장 줄 모이가 없었다.
갑자기 난감해졌다. 무심했던 마음이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바뀌었다.
"이걸 어떻게 하지???? 살아있는 녀석을 죽게 놔둘 수도 없고... 더군다나 굶겨죽일 수는 없잖아..."
아이들과 나는 열심히 쌀을 으깨서 주어 보기도 하고 가는 국수가락을 더 잘게 잘라 주어 보기도 하고 미숫가루에 그것들을 버무려 주어 보기도 했다. 하지만 병아리는 잘 먹질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병아리 모이는 사실 따로 있다. 여러 가지 곡물을 갈아 만든 것 같은.
물과 쌀가루, 국수 부스러기로 며칠을 버티던 병아리는 어느 날 급기야 기운을 잃고 옆으로 쓰러졌다.
며칠 사이 노란색 솜털이 옅어져 크림색이 된 몸통이 가늘게 숨을 쉬며 다리를 쭉 뻗은 채 죽어갔다.
아, 그 모습을 바라보는 마음이란.. 못할 짓을 하고 있다는 죄책감이 무엇보다도 컸다.
아무리 작은 병아리일지라도 한 생명이 파르르 떨며 죽어가는 것을 본다는 것은 힘들고 슬픈 일이다.
죽어가는 병아리를 보다 못한 우리들은 광장시장인지, 중부시장인지 서울시내를 이 잡듯이 다 뒤져서 병아리 모이를 구해 왔다.
그렇게 병아리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어지간히 명줄이 긴 녀석이었다.
하지만 'eating machine' 답게 열심히 먹던 녀석은 특이하게도 자라면서 꽁지 부분의 털이 나지 않았다.
"왜 저렇지?"하고 곰곰 생각해보니 아마도 영양실조의 흔적인듯싶었다.
폭풍 성장하면서 제 모습을 갖춰나가야 할 때 꽁지 털은 성장 목록에서 생략된 것 같았다.
그렇게나마 녀석은 나날이 커서 점점 중닭이 되어갔고 더 이상은 라면 상자에 넣어둘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매일매일 쑥쑥 자라는 닭은 신기하고 기특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씩 점점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아침에 상자에 넣어 놓고 온 식구가 나갔다 돌아오면 상자에서 튀어나와 온 집안을 날아다니며 여기저기 똥을 싸놓은 채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다. 상자위를 무거운 베니어판으로 덮어놔도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집안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놓는 것은 참을만했지만 이상하게 녀석은 사나웠다. 하루를 마친 식구들이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오면 쏜살같이 달려와 반기는 게 아니라 쪼아대기 일쑤였다.
인사 대신 공격이라니!!
하루 종일 혼자 있게 놔두었다고 화를 내는 건지 아니면 성정 자체가 사나운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더 이상 아파트에서 키우기는 어렵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아니 어쩌면 아파트라는 환경뿐이 아니라 우리는 다 자란 닭을 키울 마음의 준비가 안되어있었던 것일 게다.
여하튼 난 사나운 닭에 위협을 느낀 아이들의 동의를 얻어 녀석을 경기도에 있는 지인의 농장으로 보내버렸다.
좁은 아파트가 아닌 시골 농장에서 원 없이 날아다니고 뛰어다니면서 자유롭게 살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두어 달 뒤 지인으로부터 들은 슬픈 소식...
녀석을 잡아먹어버렸단다.
지인 말로는 농장 안 닭장에 넣어 놓았는데, 다른 닭들을 하도 못살게 굴어서, 게다가 밥 주러 들어가는 사람조차 쪼아대서, 그만 잡아먹어버렸노라고.
녀석은 왜 그렇게 사나왔던 걸까?
녀석이 성장하는 과정 중에 가졌던 불행한 경험이 영향을 준 것은 아닐까?
우리들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병아리적 녀석은 사느냐 죽느냐, 아니 거의 아사직전의 경험을 하지 않았나.
꽁지에 털이 나지 않는 흔적을 남길 정도였으니 녀석의 뇌에 상흔이 없을 리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어릴 적 심각한 abuse 경험은 어떤 형태로든 흔적을 남겨 평생에 걸쳐 여러 가지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던가.
게다가 그런 녀석을 우리는 그 뒤에도 텅 빈 아파트에 혼자 내버려 두었으니....
아마도 병아리적 아사 경험과 방치되었던 경험이 사나운 성격 형성에 영향을 준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4년 전에 강아지를 처음으로 기르기 시작했다.
몇 년 전부터 키워보자는 아들의 요구를 여러 번 심사숙고해서 결정한 거였다.
노인들과 함께 살아야 하니 몸집이나 성격, 그리고 털 같은 사항까지 세심하게 고려해야 했다.
녀석은 펜실베이니아의 아미쉬 마을에서 데려왔다.
평화로운 아미쉬 농장에서 어미와 형제들과 함께 살고 있던 녀석이다.
그렇게 8주 차에 데려온 녀석은 4년이 지난 지금까지 하루 24시간을 한결같이 사람들과 함께 지낸다.
정이 아쉬운 노인들은 녀석이 다가가면 기꺼이 보듬고 어루만져주고, 녀석은 노인들의 발밑에서 낮잠을 잔다.
그러면 밤에는? 물론 내 침대에서 함께 잔다. 여행도 가능하면 데려간다.
그러다 보니 녀석은 사람을 무척 잘 따른다. 어찌 보면 고양이 같이 사랑스럽고 순한 강아지이다.
녀석은 왜 이렇게 유순할까?
아마도 평화롭고 따뜻한 환경에서 자라서이지 않을까?
두 달간 어미젖을 먹고 형제들과 장난치며 자라다가 입양된 뒤에도 방치되는 일이 없이 늘 사람 곁에서 사랑받으며 자라서이지 않을까?
동물을 키워 본 경험도 많지 않으면서, 그것도 종이 다른 닭과 강아지를 단선 비교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요즈음 뒷마당에서 키우고 있는 닭들만 봐도 적절한 환경과 돌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것 같다.
아침마다 먹이통을 들고 닭장으로 걸어가면 몰려드는 닭들, 두 다리로 종종거리며 내 주변으로 몰려드는 녀석들 중 어느 한 녀석을 붙들어 등을 쓰다듬을라치면 녀석들은 가만히 주저앉으며 내 손길을 받아들인다.
그런 녀석들의 모습은 아파트에 갇혀 이유 없이 쪼아대던 녀석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넓은 닭장 안에서 부족함이 없이 주어지는 먹이를 먹으며, 때로는 뒷마당의 풀밭에서 한가로이 지렁이를 잡아먹기도 하고 모래 목욕도 하는 녀석들은 우리 집 강아지 못지않게 유순하고 평화로운 모습이다.
새삼 십수 년 전 잡아 먹힌 녀석에게 많이 미안하다.
죽을걸 뻔히 알면서 몇 푼에 팔고 샀던 사람들이어서 미안하고,
재미로 샀다가 굶겨 죽일 뻔해서 미안하고,
아파트에 혼자 하루 종일 방치해 두렵게 만들어서 미안하고,
사납다고 쉽게 포기하고 보내버려서 미안하고,
잡아먹히게 두어서 미안하다.
너를 소중한 한 생명으로 보질 못하고 살뜰하게 돌보아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다음 생에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기를.....
(뒷마당으로 나가면 멀리서도 보고 달려와 졸졸졸 쫒아온다. 내가 더불어 사는 존재임을 아는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