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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강 Oct 18. 2020

어느날 깨달은 삶의 아픈 진실

누군가는 나를 좋아할수도, 싫어할수도있다는 사실

미국으로 이사 오기 얼마 전이었다. 주변을 정리하는 중에 한 가지 꼭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내가 참여하던 모임이 멤버중 한 사람에의해  적지 않은 손상을 입고 있었고, 나는 곧 떠날 내가 그 문제를 해결할 적임자라 스스로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나서서 정리정돈을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러는 과정 중에서 세상의 누군가는 그냥 '나'를 싫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이후의 인간관계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십 년이 넘게 참여하던 모임이었다. 우리에게 성격과 치료 이론을 가르치셨던 교수님과 함께, 대학원생들을 중심으로 매월 만나 웤샾을 갖고, 집단상담을 하고, 공개강좌를 열기도 하던 모임이었다.

나는 그 웍샵에서 도대체 나란 사람은 왜 이런 모습인가를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었고, 특히 매우 독특했던 큰아이를 이해할 수 있는 근거를 찾기도 했었다.

그 모임이 한창 활성화되어있을 때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국제학회를 열기도 했었지만  많이 침체되어있을 때에는 열몇 명이 모여 한 달에 한번 모임을 갖는 소규모로 축소되기도 했었다.

내가 무엇인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때가 그런 침체기였다.

모임에서는 축소되고 침체된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관련 원서 한 권을 번역해 모임의 이름으로 책을 내는 프로젝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도무지 진척이 잘 안되고 있던 때였다.


그때 또다른 문제가 하나 생겼다.

멤버 중 한 사람이 혼자서 비밀리에 외국에 있는 이론의 창시자와 연락을 하고 있었던 것을 우리가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그 사람은 그 이론과 그 이론에 의한 검사도구의 한국 판권을 독점 계약하려고 접촉하고 있었던 거였다.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그 사람은 모임 멤버 중 한 사람이었고 모임에는 이미 실제적인 리더이며 은사인 교수님이 계셨는데도 말이다. 우리는 판권 계약을 한다면 모임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 사람은 평소에도 화려한 제스처로 모임을 밝게 만들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런 모습으로 마음이 힘든 다른 멤버들을 더 우울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너무나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다.


나는 그 사람이 존재하는한 모임은 와해되거나 많은 어려움이 생겨날 것이라 우려되어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무엇보다도 그 사람이 진행하고 있다는 판권 계약건에 대한 사실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서울 중심가에서 있었던 그날 회의에는 활동 중인 모든 멤버들이 다 참여했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다.

무거운 분위기에서 시작된 회의에서 나는 먼저 그 문제에 대해 어떻게 된 일인지 해명을 요구했다.

내심 그 사람의 사과와 모임에서의 건설적인 대안을 기대하면서.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그 사람은 모임의 반응이 어떨 것이라는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았고, 자신보다 열 살이나 적은 내가 나서서 해명을 요구하는데 발끈해 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은 나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하고야 말았다. 그것도 삿대질까지 하면서...

"나는 너 같은 애 하고는 같이 일 안 해!!"


그날 모임이 어떻게 마무리되었었는지는 기억이 흐릿하다. 다만 모임이 끝난 뒤 동년배의 멤버들이 나의 귀갓길을 걱정해주었던 것은 기억한다. "혼자 가실수 있겠어요?"라고. 아마도 내가 많이 흥분했었던가보다.

모임 후 그 사람의 회원자격은 박탈되었고 더 이상 모임에서 같이 하기는 어렵다는 결론에 모두 동의하였다.

그렇게 나는 힘든 과정이 지나간 줄 알았다.


하지만 집에 돌아온 나는 어쩐 일인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잠자리를 봐주고 자리에 누웠는데도 정신만 말똥말똥한 채 몇 시간 전의 일이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그 사람이 내게 했던 말, "너 같은 애?" 너 같은 애란 무슨 말일까?


그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열 살이나 어린 내 눈에는 그게 그렇게 크게 보이지 않았었다. 오히려 자기보다 덜 가진 사람들에 대한 가벼운 행동이 철없게 보였던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내가 자신을 그렇게 본다는 것을 알고 기분 나빠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쥐뿔도 없으면서 선배들 다 젖혀놓고 나서서 시시비비를 가리자고 나서는 내가 건방지고 당돌하다고 느꼈던 것일까? 아니면 그냥 나라는 사람을 싫어했던 것일까?

여하튼 그 사람이 삿대질까지 하면서 나에게 퍼부었던 폭언은 한밤중이 지나도 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토요일 밤이 지나고 일요일 아침이 밝았다.

가족 모두가 잠들어있던 이른 일요일 아침, 전화벨이 울렸다. 이 아침에 누굴까?

K 선생님이셨다. 우리 모임에서 가장 어른이신 분, 교수님과 함께 모임을 주도하시던 분.

선생님은 나에게 거두절미하고 사과를 하셨다.

"선생, 미안하다. 선생에게 십자가를 지게 해서 미안해, 정말 미안하다."라고.

난데없는 선생님의 사과에 나의 눈에서는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니, 소리 없는 울음이 아니라 나는 전화기를 붙들고 흑흑거리며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그렇게 우는 나에게 계속 미안하다고 하셨다.


지난밤 나는 내 '존재 자체'에 대한 공격을 받고 잠을 설칠 만큼 크게 상처를 입은 거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그런 인신 공격을 막거나 줄여줄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못한 거였다.

아니 상담가들이었던 모든 멤버들이 그런 막장드라마같은 모습에 경악해 할말을 잊어버렸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누군가가 나를 정말로 싫어한다는 사실이 너무 큰 상처를 주었다. 

이미 그 상황에서는 누구 잘하고 못하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싫어한다는 사실 앞에서는.




일요일 아침, 전화기를 붙들고 한참을 운 나는 그 상처를 딛고 일어섰다.

K선생님의 사과와 위로는 내가 상처를 털어버리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수있는 힘을 갖게해주었다.

그리고 세상의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도 받이들이기로 했다.


나의 고지식하고 무뚝뚝한 모습에 누군가는 답답해하고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고,

나의 민감하면서도 직선적인 의사소통에 상처 받고 나를 싫어할 수도 있고,

내가 가진 가치관과 사고방식 때문에 나를 피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동안 그런 나를 좋아해준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나는 내가 가진 어떤 면을 누군가는 좋아할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싫어할 수도 있다는 것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40 중반의 나이에 깨달은 삶의 아픈 진실이었다.


                             ( 오늘 다녀온 Seneca Creek State Park의 가을 하늘과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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