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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강 Oct 28. 2020

'상식'에 한 표를 던지고 왔다.

Early Voting 을 한뒤 나의 젊은 날을 돌아보다.

월요일인 어제부터 조기투표가 시작되었다. 코로나를 고려해서 우편투표를 할까 잠시 생각해봤으나 말 많은 우편투표에 내 소중한 한 표를 집어넣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조기투표를 하기로 하고 오늘 남편과 함께 다녀왔다. 화요일인 오늘, 집 근처 한 체육관에 설치된 투표소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오고 있었고 그들도 모두 자신의 소중한 한 표를 심사숙고해 행사할 터였다.

나 역시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가 '좀 더 상식적인 나라'가 되도록 애쓸 누군가에게 한 표를 던졌다.

그는 다른 것은 몰라도 정치인생 전반에 걸쳐 '총기 규제'에 관해서는 일관되게 이야기했던 사람이니 그의 의지에 기대를 해본다. 오늘 나의 투표가 미국 정치에 작은 물방울이 되고 그 물방울들이 모여 도도하게 흐르는 민주주의의 강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실 나는 그렇게 정치적인 사람은 아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정치적 신념을 위해 헌신할 만큼 정치적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못된다. 이런 내가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대학 2학년 때였다.

이름하여 '서울의 봄'.

1979년 10.26 사태로 나라 전체가 뒤숭숭할 때, 겨울이 지나고 새봄에 시작된 학교는 학내문제와 시국문제를 가지고 이곳저곳에서 날 선 토론을 있어가고 있었다. 

어쩌다가 학도호국단 문예부에 관여하게 된 나는 어쩔 수 없이 학생 대토론회에 참석해야 했는데 성실한(?) 학생이던 나는 수업시간을 피해 가면서 토론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날도 시국문제로 난상토론을 하고 있었다. 

한참 토론을 진행하던 중에 누군가가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렇게 수업도 전폐하고 나라를 위한 투쟁을 하고 있는데 지금 이 시간에도 도서관에 앉아 고시 공부하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란 말이냐? 그들도 우리와 함께 동참하게 해야 하지 않는가?!"

이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하지만 그의 말을 이어 또 누군가가 목청을 높였다.

"도서관을 폐쇄하고 그들을 끌어내자, 그리고 그들이 우리와 함께 행동하도록 하자!!"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 이전까지는 그저 목소리 큰 선배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소극적 참여자였던 내가 작심하고 일어나 일갈했다.

"이제까지 우리는 독재를 타도해야 한다고 말했지 않나, 그런데 지금 이것은 무엇인가?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끌어내야 한다니, 이게 우리가 타도하려고 했던 독재의 모습이 아니고 뭔가? 나 역시 이 시국에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그들을 이해할 수는 없어도 그들의 결정을 존중해야 그것이 민주주의 아닌가?"라고 말이다.

그 뒤로는 난 호국단 간부가 아니라 그냥 학생 한 사람으로 시위에 참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회복지사로, 두 아이 엄마로, 대학원생으로 열심히 살던 나는 IMF 최전선에서 최선을 다했다. '희망의 집'이라는 노숙인 쉼터를 설치 운영하고, 주말이면 서울역으로, 용산역으로 심야상담을 나가고, 일요일 새벽이면 흑석동 남석 교회에서 운영하는 무료급식소를 찾아 현장 상담을 나가곤 했었다. 

IMF체제하에서 무너지는 가족들과 사회 구성원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고민하기 위해 어느 복지관에 모여 한밤중이 되도록 논의하고, 사업을 만들고, 해 나갔다. 


그렇게 IMF가 지나고 겨우 한숨 돌릴만해지자 이명박 서울시장은 서울시내 복지관을 평가하겠다고 나섰다.

그동안은 규모별로 서울시 지원금을 교부하던 것을 평가 후, 평가결과에 따라 차등 지원하겠다는 말이었다.

같은 예산액을 가지고 줄을 세워 잘한 곳은 더 주고, 못한 곳은  덜 주겠다는 것이다.

평가와 평가과정의 순기능을 도외시한 너무나 천박한 행정 정책이었다. 

하는 수없이 IMF체제에 맞서기 위해 뭉쳤던 역전의 용사들이 다시 모였다. 각 복지관의 실무책임자들이 모여 서울시의 졸속 행정을 철회하고 제대로 된 평가제도를 순차적으로 도입할 것을 주장해야 했다.


그렇게 서울시내 복지관들의 거의 모든 사회복지사들이 모인 중앙대 강당에서 나는 선언문 낭독을 했다.

왜 그날 내가 선언문 낭독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내 연차를 고려해 떠맡게 된 것인지, 내 목소리를 고려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강당을 가득 메운 동료들 앞에서의 선언문 낭독은 내 심장소리가 밖에서 들릴 정도로 내 성정을 뛰어넘는 과도한 것이었다. 

아마도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심장마비가 일어나지 않을까??




일을 끝내고 돌아오던 차속에서 아들의 전화를 받았다.

"엄마,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셨대요.."순간 현기증이 일어났다. 

우리의 고국, 대한민국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찾아 나섰다. 어떻게든 힘을 보태기 위해 우리 부부는 진보단체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 진보단체는 고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시고 나서 만들어진 단체였다.

그동안 이민사회의 좁은 시야에 답답해하던 우리는 그 단체에서 '상식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과 어울렸다. 어떤 날은 우리 집에서 있었던 모임에서 '이명박 퇴진 100일 시위'가 결정되기도 했고 석 달간 우리 부부는 월요일 시위에 참여했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다 세월호의 비극을 맞닥뜨렸다. 내가 떠나온 한국이 좌초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애써 시간을 내기로 하고 전세버스에 몸을 싣고 뉴욕의 시위에 참여했다.

나와 남편은 피켓을 들고 세월호의 진상규명을 외쳤다. 

그렇게라도 충격과 상심에 빠진 그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 우리와 마음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 뒤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 진보 모임이 박근혜가 당선된 대선 이후 사분오열했기 때문이었다.

모든 조직이 그러하듯 시간이 지나면 초심이 변색되고 그 자리를 개인적 욕망과 갈등이 채우게 되어 있다.

우리는 그동안의 열정적 참여를 뒤로하고, 이제는 그렇게 앞장서 행동하는 사람들과 조직을 후원하는 일로 대신하고 있다.

매달 뜻을 같이 하는 소시민들의 마음을 모아 노무현 재단, 대안언론, 416 연대, 환경운동연합 등에 후원하는 일말이다.


뉴욕에서 열렸던 세월호 특별법제정 촉구 집회 참석 사진




이제야 나는 내 성정과 역량에 맞는 정치참여를 하고 있다고 느낀다.

선거에 출마한 사람들의 역량과 의지를 조사하고 그들의 정치적 견해를 확인하고 가장 근접하게 나의 의견을 반영한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한 표를 던지는 것, 그것이야말로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정치참여이다.


이번 투표에서는 대통령과 국회의원뿐이 아니라 카우니 판사를 재신임할 것인지를 묻는 투표도 있었고 주법의 개정에 관한 몇 가지 사항도 있었다. 그중에서 다른 것은 몰라도 늘어나는 교육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스포츠와 경기 내기 도박을 확대할 것인지를 묻는 주민투표엔 반대표를 던졌다. 지난번 투표 시에도 반대표를 던졌지만 찬성표가 더 많아 설치된 대형 카지노로 인해 수많은 부작용이 생긴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부디 나와 같은 반대표가 더 많이 나오기를 바랄 뿐이다. 


하지만 젊은 날의 내가 함께했던  정치참여, 사회참여의 모습은 지금도 날 미소 짓게 만든다.

어리버리하고 내향적인 내가 그렇게라도 내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내가 푸릇푸릇하고 혈기 왕성한 젊은이였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지금도 떠오르는 장면.

'서울의 봄', 그날 선배들과 친구들과 함께 뛰어가 다다른 서울역 광장.

열 지어 빽빽이 앉은 우리들이 우렁차게 외치던 '독재 타도'의 가슴 벅찬 함성.

문득 한쪽에서 들려오는 함성에 쳐다보니 서울역 고가 위에서 우리들을 향해 던지던 노신사의 장미꽃 송이들.

"그래, 젊은이들이여, 그대들이 있어서 세상은 아직 희망이 있다."는 메시지.


내 인생의 아름다운 몇몇 장면중 하나였다. 내가 함성속에 있던 그날의 모습이.


10월 27일 미국 대통령선거 조기투표 마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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