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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강 Nov 15. 2020

그녀에게 결혼증명서는 생명이었다.

국제결혼은 그녀에게 구원이었을까?

얼마 전 그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난청과 세상과의 단절, 그리고 정신병을 천형처럼 안고 살았던 그녀가 하늘에서는 그 모든 족쇄들을 풀고 자유를 누리게 되었을까?

그녀가 평생 생명처럼 붙들고 있었던 '결혼 증명서'는 하늘나라에도 가지고 갔을까?

나는 그녀가 낯선 미국인과 결혼해서 영원히 외도톨이로 살았던 이 세상에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고, 어린 그녀가 뛰어놀던 70여 년 전 마음속 고향으로 되돌아갔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다른 주에서 딸과 함께 살던 그녀는 점점 심해지는 조현병으로 더 이상 딸 곁에서 살 수가 없게 되었었다.

그래서 그녀는 젊은 시절 그녀가 살았던 이 지역의 한 양로원으로 옮겨와 살고 있었다.

이곳엔 그녀의 몇 안 되는 친지들이 있었고 한국말을 전혀 못하는 그녀의 딸은 어머니가 자신보다는 한국말로라도 대화할 수 있는 환경에서 살기를 원했다.

그렇게 그녀는 다른 시설에서 십여 년을 살다가 내 시설로 옮겨온 것이었다.

그녀의 입소는 사실 처음부터 내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었다. 

그녀는 난청인 데다가 조현병 증세가 점점 심해지고 있어서 정신과적 치료를 병행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입소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방 안에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찾던 그녀는 돌진하듯이 거실로 뛰어나와 누군가가 자기 서류를 훔쳐갔다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무슨 서류? 어떤 서류?"라고 물어보는 우리에게 그녀는 손가락으로 네모를 그리면서 "결혼 증명서!!"라고 소리쳤다. 사실 입소 첫날 이미 그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그 결혼 증명서이고 그것을 이리저리 싸고 또 싸서 어떤 가방 안에 넣어놓는 것을 눈여겨보았었다.


나는 우선 그녀를 진정시키고 같이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녀가 넣어두었던 가방을 열어보았더니 그곳엔 없다. 다시 서랍장을 하나하나 열어서 찾아보는데 여전히 찾을 수가 없다. 

내가 열심히 찾는 것을 옆 침대에 앉아 쳐다보던 그녀는 누군가가 훔쳐갔다고 또 소리를 지른다.

나는 그녀를 진정시키고 다시 처음부터 찾아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서랍장의 서랍을 몸체에서 빼내어서 찾기 시작하는데, 아하, 서랍장 뒷벽으로 떨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그것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자 그녀가 "Thank you!" 하며 서류를 받아 가슴에 가져간다.




사회학자인 노명우 교수는 '아들이 대신 쓰는 부모의 자서전'인, 책 <인생극장>에서 자신이 살았던 파주시 기지촌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한다.


" 한반도에 승전국으로 상륙한 미국의 힘은 막강했다. 음악이 흐르는 클럽에서 여자와 남자가 함께 춤을 추지만, 그들은 결코 수평적인 관계가 아니다. 1958년의 영화 <지옥화>에는 연출되지 않은, 미군 클럽의 실제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시퀀스가 있다. 남자들은 군복을 입은 미군이다. 그들의 품에 안겨 있는 여자들은 전쟁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극소수의 모던걸이나 시도했음직한 헤어스타일에 양장을 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가 짝을 지어 춤을 추는 모습에서는 로맨스의 감정이 느껴져야 하는 법인데, 이 시퀀스를 보면 가슴이 아려온다. 1945년 8월 15일 이전까지는 어느 누가 이런 장면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미군과 함께 춤을 추는 여자들 중에서 자신이 그런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을 거라고 예감한 사람이 있었을까?"(p.219)


"삼거리 사람들의 모든 꿈은 미국으로 향했다........ 미국은 '벌레'가 된 느낌을 떨칠 수 없는 사람들에게 탈출구를 제공했다. 삼거리 사람 중에서 실제로 미국에 가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삼거리에서 미국은 '벌레의 시간'이 종식되는 공간으로 통했다. '군인이 아닌' 미국인이 사는 아메리카는 말만 들어도 삼거리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일종의 이상향이었다. "(pp. 248-249)


그녀도 노명우 교수가 이야기하는 그 삼거리 사람들 중의 한 명이었을까?

<인생극장>에서 묘사하고있는 기지촌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불현듯 그녀를 떠올렸었다.

그녀는 미군부대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웨이츄리스였을수도있고 느닷없이 들이닥친 미군캠프에 소작해먹던 땅을 내어주고 그곳에 잡부로 취직한 어느 농부의 딸일수도있다.

과년한 그녀는 모든 삼거리 사람들의 꿈처럼 미군이었던 남자를 만나 미국으로 건너왔고, 그 남편과의 사이에 자신의 생명줄 같은 자식을 낳았다. 

내가 아는 한 그녀의 남편은 많은 미군들이 미국에 데려온 한국의 아내를 버렸던 것에 반해 그녀를 버리지 않았고 그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외국어를 가장 잘 배우는 방법은 그 외국어를 구사하는 가족들과 함께 사는 것이다. 그래서 국제결혼을 한 대부분의 한국 여성들은 영어 구사의 질적 차이는 있을지언정 영어로 의사소통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더더군다나 자녀를 낳아 그 자녀가 미국의 교육을 받게 되면 덩달아 그 부모도 영어에 노출되고 동화되어나가게 된다.

하지만 난 그녀가 "Thank you."외에는 영어 하는 모습을 본적이 없다.


그녀는 난청으로 영어든 한국어든 의사소통이 극히 제한적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속에서 난청을 선택하게된것이었을까?

알수없다. 하지만 그녀는 고립될 수밖에 없었고, 그 고립이 그녀를 자신의 세계 속으로 가두는 조현병 환자로 만들었을수도있겠다.

나는 그녀가 그 긴 세월 동안 말도 안 통하는 남편과 아이와 이 미국에서 어떤 삶을 살았을까를 생각할때마다 그녀의 구부러진 등어리가 너무나 가여웠다.


세상 사람들을 믿지 않았던 그녀였지만 그녀는 식구들 중 누구 못지않게 인정스러웠다. 

누군가가 졸면서 침을 흘리고 있으면 손 내밀어 닦아줄 줄도 알았고, 다리가 부러져 입원했던 그녀를 이 병원 저 병원으로 데리고 다니는 나에게 꼬깃꼬깃 접은 지폐 한 장을 쥐어주고 싶어 안달하던 사람이었다.


반면에 아침저녁으로 웃통을 벗어젖히고 요란하게 세수를 해대고, 콜드크림을 바르고 나서야 잠자리에 드는 그녀는 보라색 빗 하나를 가지고 옆방 할머니와 다투고 기어이 뺏어 들고 자기 것이라 우기는 말썽꾸러기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가슴 아픈 것은 그녀가 환청과 환시를 통해 자신의 어릴적 딸을 만나고 기다린다는것이었다.

밤잠을 자다가도, 낮잠을 자다가도 그녀는 어린 딸의 이름을 부르며 거실로 뛰어나왔고, 수시로 현관문을 열고 밖을 쳐다보았다. 학교 갔다 돌아오는 아이를 기다리는 엄마의 모습으로, 또는 자신을 세상과 연결해주는 그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모습, 바로 그 모습으로.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자신의 아이와도 제대로 대화할 수 없었던 그녀.

결혼 증명서만이 자신이 누구이고, 누구의 아내이고, 그리고 이 나라의 합법적인 시민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던 그녀.

고립 속에서 자기 안으로만 숨어들 수밖에 없었던 그녀.

자신을 포기한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밤낮으로 그 자식을 그리워하던 그녀.

십 년을 보살핀 사람도, 2년을 보살핀 나도 감당할 수 없었던 정신적 어려움을 안고 살았던 그녀.

전쟁과 가난으로 앞이 안보이던 나라를 떠나 또 다른 절벽에서 평생을 두려워하며 살았던 그녀가,

이제는 평화 가운데 진정한 휴식을 갖게 되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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