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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강 Jan 29. 2021

그들이 '기억 수첩'을 꺼내 보일 때.

끌어올려진 기분 좋았던 기억, 그 기억 속에 함께했던 시간들

한국에 계신 시어머니와 화상채팅을 할 때면 어머니는 매번 "어머니"라고 크게 불러보라고 남편에게 부탁한다. 처음에는 치매를 앓는 시어머니가 마땅한 대화거리를 찾지 못해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것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남편이 "어머니"라고 불러드릴 때 어머니는 환하게 웃으며 "오냐, 내 아들"이라고 기뻐하며 화답한다. 


어머니에게 자식이 "어머니"라고 크게 불러드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오며 어린 남편이 크게 불렀을 "엄마, 어머니"는 어쩌면 젊은 날 힘겨웠던 어머니를 버틸 수 있게 해 주었던 '그녀의 이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점점 지워져 가는 기억 속에서 남편의 얼굴을 볼 때마다 환해지는 어머니의 모습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화상채팅으로 그녀를 만나러 간다.




너무나도 무뚝뚝한 할아버지가 계셨다.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을 나오고 미국에 유학을 와서 더 공부를 하고 우리나라 재벌 기업의 미국 브랜치를 책임지던 분이셨다. 그분에게는 교양 있고 상냥한 부인이 계셨는데 할아버지는 그 할머니에게조차 거칠고 무뚝뚝하기 그지없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우울증으로 성격이 바뀌었다고 이야기하시지만 내가 보기에 할아버지는 치매가 시작되며 우울증과 성격 변화를 보이고 계신 것 같았다. 고집 세고 더 말이 없어지고 폭력을 행사하기까지 하는 모습으로.

남편을 무척 사랑하셨던 할머니는 본인이 할 수 있는 때까지 할아버지를 케어하셨지만 덩그러니 큰 집의 이층에서 구르는 사고를 당해 골절이 되신 뒤로는 할머니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있었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병원과 재활병원을 걸쳐 우리 집으로 오셨다.

부득이하게 집이 아닌 시설에서 돌봄을 받아야 하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셨던 할아버지는 마지못해 입소는 했을지언정 어느 누구에게도 곁을 주시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부축을 받아 화장실을 가고 샤워를 하면서도 감사하다는 표현을 그만두고 걸핏하면 화를 내셨다.

내가 보기에 모두에게 화가 나는듯했다. 

자신을 우리 시설로 보낸 할머니에게도, 우리 부부에게도, 직접 케어를 해주시는 케어 선생님들에게도, 그리고 타인의 손에 의해 자신의 일상을 의존해야 하는 자신에게조차도.


이런저런 케어와 일들로 번잡한 하루가 지나고 저녁시간이 되면 우리는 같이 거실에 앉아 티브이도 보면서 그분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이 시간은 그분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고 우리가 '한 가족'으로 묶일 수 있는 소중한 시간들이다.

이 시간을 통해 어르신들은 우리 공동체에 마음을 열기도 하고 '우리 가족'의 '구성원'이 되기로 마음을 먹기도 한다.

남편은 할아버지가 입소하면서부터 그분과 대화를 해보려고 무던히 애를 쓰고 있었다.

다행히 할아버지가 임원으로 있었던 대기업의 자동차 회사에 근무했던 남편은 어느 날 저녁, 할아버지와 그 대기업에 대해 공통의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물론 대화라기보다는 남편이 묻고 할아버지가 yes/no로 대답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십여분 정도 대화가 이어지자 할아버지 얼굴에 엷은 미소가 비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그 대기업이 한국 경제성장에 이룬 것들이 많아요, 그렇지요?"

"응"

"그런 대기업에서 그것도 미국법인을 이끌었으니 사나이로 한평생 여한 없이 일하고 성취하신 거네요."

"응"

"언젠가 그곳에서 무슨 프로젝들을 하셨는지 이야기해주세요."

"응"

대답은 "응"뿐이었지만 그 대화만으로도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자신이 이룬 일들에 대한 자부심이 얼굴 가득 번져오고 있었다.


그 할아버지가 점점 더 힘든 상황이 되어가고 있었다.

저녁시간이 지나고 잠자러 들어간 할아버지는 무엇이 불안한지 수시로 방문을 열고 밖으로 다시 나왔다.

이미 모두들 자러 들어간 늦은 시간에.

그럴 때면 남편은 할아버지를 부축해서 다시 방으로 모시고 들어가 침대에 뉘우고 잠시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할아버지의 마음이 가라앉고 편안히 잠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대화중에 우리는 할아버지가 학군단 출신임을 알게 되었다. 

아하, 할아버지와의 공통분모가 하나 더 생겼다.

그리고 그 날부터 할아버지의 잠자리에서는 거수경례를 하며 "충성"구호를 외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학군단 초창기 선배님과 20기 후배의 진지했던 경례 의식.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점호하는 시간.

거수경례를 받으며 할아버지는 불안한 마음을 젊은 날의 기억으로 다둑이며 덮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방문 뒤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손으로 틀어막고 바라보던 나는 점점 그들의 진지함에 동화되어 한밤중의 의식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그때의 할아버지는 치매 말기로 치닫는 고집 세고 불안해하는 노인이 아니라 까마득한 후배의 경례를 받고 흐뭇해하는 자부심 강한 학군단 선배님의 모습, 바로 그뿐이었던 것을.


할아버지는 한때 같은 회사 로고를 가슴에 달고 살았다는 것과 같은 청년 장교였다는 동질감을 가지고 남편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나와 다른 스텝들에게까지도 서서히 곁을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할아버지가 곁을 주는 만큼 다가가 조심스레 마지막 가시는 길까지 돌봐드릴 수가 있었다.




할머니는 떡장수이셨다.

젊어서부터 한량이었던 할아버지를 대신해 떡을 팔아 가족을 먹여 살렸던 분이셨다.

그 할머니가 중년을 한참 넘어 미국 이민을 오셨다.

그때나 지금이나 먼저 이민 온 친지가 있거나 가진 돈이 넉넉하면 살기가 좀 낫지만 할머니는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시작한 게 다시 떡장사였다.


"처음에는 쌀 한 됫박으로 떡을 만들었어. 잘 팔렸지. 그래서 그다음 날엔 두 됫박을 담갔어."

"재미있었겠네요."

"재미있고말고. 매일매일 늘려서 떡쌀을 앉히는데 아주 좋더라고. 신났었어."

"늦게 이민 와서 성공하신 거네요."

"성공한 거지. 한 됫박으로 시작해서 방앗간으로 키웠으니까."

 

두 손으로 양을 가늠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할머니는 해맑게 웃으셨다.

할머니의 웃음은 뭔가를 이뤄내는 기쁨에 가슴 부풀어하는 소녀의 웃음을 닮아있었다.


마지막 즈음에 나타나는 망상 증세에서 할머니는 떡쌀을 시루에 따둑따둑 앉히는 모습, 팥고물을 쌀가루 위에 설설 뿌리는 모습, 가끔은 귀퉁이 한쪽을 떼어 맛을 보시고 입맛을 다시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셨다.

할머니에게 있어 떡은 삶 그 자체였던 것 같다.


가끔 할머니를 떠올릴 때면 두 손에 쌀을 퍼담은 듯 모으고 웃으며 한 됫박, 두 됫박 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 지어 보이던 환하게 빛나던 성취의 미소와 함께.




< 도리스의 빨간 수첩 > (소피아 룬드베리 저, 문예출판사)에는 도리스의 삶에 존재했던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도리스에게 안전과 책의 존재를 느끼게 해 주었던 아버지와, 도리스를 포기하고 남의 집 가정부로 보내버렸던 힘없는 어머니, 자신이 돌보아야 했던 여동생과 평생지기 화가 친구, 그리고 도리스가 평생 가슴에 담고 살았던 사랑하는 사람까지.

죽음을 앞에 둔 도리스는 사랑하는 조카손녀에게 자신의 빨간 수첩을 전해주고 싶어 한다. 빨간 수첩에 적혀있는 모든 사람들은 도리스의 삶에 어느 순간 존재했던 사람들, 그들과의 기억을 소환시키는 존재들이다. 

평생을 그리워했던 기억과 아프게 했던 기억들, 그것은 곧 도리스의 삶 자체이다.


나는 내가 돌보는 분들과의 만남 속에서 그들 모두도 '도리스의 빨간 수첩'같은 자신들만의 '기억 수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기억 수첩'에는 그들의 삶이 한순간 찬란하게 빛나던 그 순간들과 아팠던 기억들이 함께 기록되어있다는 것을 발견하게된다. 

도리스가 옛사람들이 적혀있는 '빨간 수첩'을 손녀에게 보여주고 싶어 했듯이 그들도 때론 '기억 수첩'을 꺼내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래서 가끔씩 우리는 그들의 마지막 삶의 순간에 초대받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느날, 그들이 '기억 수첩'을 꺼내 우리에게 환했던 삶의 어느 순간을 보여줄 때 그들은 그때처럼 다시금 미소 짓는다는 것을, 미소짓는 그 순간에 우리가 함께 하는 축복을 나누어주고있음을 느낀다.

그 미소는 휘어지고 굳어진 그들의 삶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시나마 살만하게 느끼게 한다는 것을 나는 안다.


(  이 글은 장기중 작가님의 글을 읽고 떠오른 분들을 생각하며 쓴 글입니다. 그분들이 옛일을 회상하며 미소짓던 그 기억속에 내가 함께 했던 시간들입니다. 그 순간도 언젠가는 내 기억속에서 미소와 함께 되살아나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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