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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강 Mar 12. 2021

우리들의 이야기, 영화 '미나리'

영화 미나리에서 이민자 우리들의 모습을 보다.

"아들, 오늘 저녁 우리는 프라임에서 영화 '미나리'를 보려고 하는데 너도 들어가서 봐라."

"음,,, 두 분이서 재미있게 보세요. 나는 보고 싶지 않아요."

"왜?, 미국 이민가족의 이야기라 공감되는 것도 많고 재미있을 텐데.."

"내 인생이 충분히 드라마틱해서 다른 이민자들의 드라마까지 보고 싶진 않네요."

"흠,, 그래? 그렇구나...."


프라임에서 48시간 동안 19.99불에 영화를 볼 수 있도록 해놓고 아들에게 전화를 했는데 안 보겠단다.

있을 수 있는 반응이다. 우리는 미나리의 주인공 같은 미국 이민자들이니까.

우리의 이민 초기 경험이 영화 한 편으로 다시 한번 파헤쳐지고 그것으로 겨우 다둑여놓은 힘든 감정들이 수면 위로 튕겨져 올라온다면 그것도 어려운 일일 게 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주말 저녁 어르신들 몇 분과 티브이 앞에 앉았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너무 익숙한 컨테이너 하우스와 병아리 감별, 미국 교회에서의 어색한 모습 같은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영화에서 주인공 가족은 대도시 LA에서 살다가 아칸소의 시골로 들어간다.

이삿짐을 싣고 도착한 새 터전. 그들이 마주한 새집은 바로 컨테이너 하우스이다.

컨테이너 하우스?

집터에 벽돌 등으로 지지대를 놓고 그 위에 집채를 통째로 얹어놓는 형태의 집은 말 그대로 컨테이너를 집으로 개조해 만들어놓은 것이다. 그 안에 몇 개의 방이 있고 부엌과 작은 거실, 화장실이 있지만 프레임은 컨테이너일뿐이다.

30-40십 년 전 이민 온 이민 선배들에게는 너무 익숙한 장면이다.


오래전 이민 온 선배들은 대도시의 낡고 좁은 아파트에서 살거나 시골의 그런 컨테이너 하우스에서 살았다.

아마도 직업 때문 일 것이다. 

대도시의 주변에는 이민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들이 상대적으로 많다.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특별한 교육을 받지 않아도, 무엇보다도 영어에 어려움이 있어도 찾을 수 있는 직업들 말이다. 

세탁소, 핸디맨, 음식점, 컨비니언 스토어, 뷰티 서플라이, 달러 스토어 등에 취업하거나 운영을 하려면 대도시 근처에 있어야 한다. 일터가 있는 곳 가까이에 집이 있어야 일에 전력투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농장이나 농축산 가공공장 등에서 일을 시작하는 이민자들은 컨테이너 하우스에 좀 더 친숙할 것이다.

영화에서 나오는 바로 그런 하우스.

이민 초기 닭 농장을 운영하시던 이민 선배님의 처음 집도 컨테이너 하우스였다.

닭 농장 바로 옆에 놓여있던 하우스. 뭐가 뭔지 잘 모르는 채 인수한 닭 농장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닭들을 돌봐야 했고 그러려면 농장 바로 옆의 숙소가 필요했다. 

일꾼들 숙소 같은 분위기에 어수선한 집안에서는 종종 쥐들이 돌아다닌다고 하셨다.


이민 후발대인 나는 컨테이너 하우스 경험은 없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그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고 그동안 한국의 국가경제가 급성장했기 때문이다. 

컨테이너 하우스에서 이민의 삶을 시작했던 이민 선배들은 새로 오는 이민자들을 통해 고국이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간접적으로 본다. 격세지감을 느끼면서. 




영화 속 주인공 부부는 병아리 감별사가 직업이었다. 

닭고기 산업에는 가장 일손이 많이 필요한 두 영역이 있는데 하나는 병아리 감별이고 또 하나는 닭 가공 공장이다. 그중에서도 병아리 감별은 일일이 사람 손으로 감별을 해야 하고 상대적으로 노동강도도 약하기 때문에 많은 이민자들이 쉽게 취업하는 분야이다.

병아리 감별에는 학력도, 경험도, 성별도, 나이도, 영어능력도 상관없다. 

병아리가 암놈인지 수놈인지 잘 구별해서 나눠놓기만 하면 된다.


영화를 보면 그렇게 걸러진 수컷 병아리는 모두 불에 태워진단다.

알도 낳지 못하는 데다 고기를 먹기에도 좋지 않은 수탉은 아기 때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영화에서 굴뚝을 통해 나오는 연기와 대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미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은 곧 생산성과 환금성에 직결되어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검은 연기로 표현되는 이민자의 고단한 삶의 메타포인가?


내가 살던 곳에서도 많은 분들이 병아리 감별을 하셨다.

닭 농장을 운영하는 분의 아내도, 옷 수선을 하는 분의 아내도, 과수원을 하는 분의 아내도, 힘든 일을 하고 싶지 않은 어느 중년 부부도 감별 일을 하신다.

영화 속 장면처럼 그들은 나란히 앉아 일을 한단다. 새벽부터 오후 두세 시까지.

같은 병아리 감별소에서 함께 일을 하고 점심을 같이 먹으며 그들은 정도 나누고  삶과 인간관계의 온갖 드라마도 만들어낸다.




시골생활로 너무 적적해하던 아내가 일터의 한인 동료에게 한인 교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다.

그러자 동료는 어떤 이들은 한인교회를 피해 이곳으로 이사 왔다는 의미 있는 말을 한다.

이민 사회에서 교회(성당)는 어떤 존재인가?


우리는 이민 수속이 막바지에 다다르자 우리의 정착을 도와줄 그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다.

우리가 살 아파트를 미리 알아봐 주고 우리 대신 미리 계약을 해줄 수 있는 존재들.

인터넷과 이주공사를 통해 알아보니 우리가 갈곳에는 한인 공소(성당보다 작은 교회 공동체)가 있었다.

우리는 그곳의 책임자에게 연락을 했고 그들은 기꺼이 우리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었다.

그들 중 한 분이 아파트를 알아봐 주고 도착하자마자 계약서를 작성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주었다.

또 한 분의 아들은 아이들의 학교 등록을 도와주었다.

또 한 사람은 우리에게 라이드를 해주었다. 그 사람의 도움으로 우리는 차 딜러샵에 가서 차를 샀고 그 차로 미국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구체적인 도움뿐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어리바리한 우리들을 초대해 그들의 경험을 나누어주었고 따뜻한 밥 한 끼로 이민의 막막함을 덜어내게 도와주었다.

돌이켜보건대 한인 공소는 우리들의 미국 정착에 엄청난 도움을 주었고 그 감사함은 아직까지도 여전하다. 


하지만 감사함과 헌신으로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가던 나는 어느 날 더 이상 성당에 나가지 않게되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나가기 어려웠다.

이유는 성당 식구들 간에 빚어진 드라마 때문이었다.

우리는 한 달 늦게 입국한 어느 가족을 마치 우리가 도움을 받았듯이 도와주었고 그녀는 무척 고마워했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두어 달이 지나자 그녀는 우리 가족에 대한 험담을 성당 식구들에게 하고 있었고 나는 그녀가 성당 모임에서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여전히 이유를 알 수 없는 채 나는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을 포기했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나 홀로'신자로 살고 있다.


교회(성당)는 그런 곳이다.

이민사회에서는 특히 더하다. 내가 어려움에 처해있거나 도움이 절실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면서 동시에 나를 아프게 하는 모든 드라마가 만들어지는 곳.

영화에서 병아리를 감별하며 무심한 듯 내뱉는 그녀의 대사는 이민사회에서의 교회 공동체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도 한인교회가 많지만 LA 같은 곳에는 셀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언어에 서툴고, 이 사회에 서툰 이민자들은 한인교회에 모여들게되어었다.

내가 어려움이 많을수록, 기대하는 것이 많을수록 교회에 몰입하는 정도는 깊어진다.

교회에 몰입하는 정도가 깊어질수록 상처 받을 가능성은 더 커지는 거다.

상처가 두려워서 종교생활을 포기할까마는 이민사회에서의 교회의 역할은 앞으로도 고민해 봐야 할부분이다.


그러면 미국 교회에 가면 되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겠다.

내가 다니던 공소도 한 달에 한번 한국 신부님이 오시는 미사를 제외하고는 미국 성당의 미사에 참례했었다.

미국 신부님의 영어 강론과 영어로 진행되는 미사 전례, 영어 성가. 

몇 달 지나니 어느 정도 흉내 내는 정도까지는 되었으나 끝내 편안하지는 않았다. 

충분히 이해되지 않는 강론으로 내 부족한 신암심이 건드려지지 않았고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 미국인들에게서 내가 그들의 이웃임을 느끼기는 무리였다. 


결국 교회의 일원이 되고 싶으면 한인교회를 찾을 수밖에 없고 교회의 일원이 되는 순간 우리는 천국과 지옥의 문에 함께 발을 들이는 것과 같아진다.




영화 '미나리'덕에 15년 전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아무런 가구도 없이, 이민가방에 가져온 빤짝이 깔개 위에서 밥을 먹고 카펫 바닥에 누워 첫날밤을 보내던 일.

처음 보는 대형 월 맡에서 접시 네 개와 빗자루 쓰레기통 몇 개 사서 시작했던 미국에서의 첫 며칠.

내 국민연금 해약한 돈으로 산 새 미니밴으로 이곳저곳 자동차 여행하던 일.

운전면허 시험장에서 덜덜 떨면서 자동차를 몰던 일.

호기롭게 취업한 세탁소에서 일주일만에 짤리던 일.

남편과 함께 오픈한 가게에서 첫날 번 돈 45불의 감격.


영화 속 주인공 부부는 그 기름진 땅에서 나파 배추(한국 배추)를 재배하고 애호박과 가지, 아삭이 고추를 재배해서 한국음식점에 납품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돈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아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드는 가족의 멋진 결실을 이루었다.


나에게 영화 '미나리'가 얼마나 작품성이 있고 없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들의 이야기는 바로 나의 이야기이고 나 역시 그들 부부의 고단한 삶과 같은 이민의 여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 여정의 색깔과 그 색깔의 농담은 있을지언정 이민자 우리들의 출발과 종착역은 비슷해 보인다.

그것은 "새로운 삶의 도전과 낯선 곳에서 뿌리내리기"라는 여정일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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