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움과 즐거움이 공존하는 삶과 여행
어스름했던 창밖이 점점 환하게 밝아져 온다.
정말 오랜만에 느긋하게 잠이 깨어 아침이 밝아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침대에 누운 채로다.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 숙소는 모든 것이 깨끗하고 하얗다.
점점 붉고 환해져 오는 창밖과 그 빛에 드러나는 하얀 침대 시트를 바라보며 "여행을 떠나온 지금 이 순간,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생각에 빠져든다.
우리 부부는 조금 특별한 내 생일을 맞아 서부여행을 하기로 했다.
바위와 사막으로 이루어진 광활한 서부의 모습은 언제 보아도 감동이고 나를 겸손하게 한다.
새로운 갑자를 시작하는 이 순간도 나는 Mother Nature앞에 더 겸손해지고 싶었다.
몇 년 전 여행에서는 라스베이거스를 통해 들어왔다면 이번에는 Salt Lake City를 통해서 들어갔다.
아침 일찍 Baltimore공항에서 출발해 Denver를 거쳐 Salt Lake City에 도착하는 장거리이다.
미국은 큰 나라이다. 아침 일찍 출발한 우리는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도착했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공항에서 차를 렌트 하고 식료품 장을 본 뒤에 세 시간이 넘게 차를 몰아야 우리가 보고 싶었던 Arches National Park 근처의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를 온종일 날고 달려서 도착한 숙소였다.
이미 날이 많이 저물어 들어간 숙소에서 간단히 식사를 해결하고 우리는 4박 5일의 일정을 다시 컨펌을 한다.
첫날은 Devils Garden Trails과 Delicate Arch를 가볼 셈이다.
둘째 날은 이번 여행의 진수, Canyonlands Trails을 걸을 계획이다.
이틀에 걸친 두 Trails을 걷는 게 이번 여행의 핵심이고 그다음 일정은 상황에 따라 Monument Valley나 주변을 돌아볼 생각이었다.
사실 우리의 여행은 나보다 주로 남편이 일정을 짜고 주도한다. 이미 짜인 일정과 프로그램에 편승하는 여행을 편안해하는 나에 비해 남편은 어디를 갈지, 어디서 묵을지, 차편을 어떻게 할지 일일이 계획하고 준비하는 여행을 좋아한다. 이번 여행도 남편이 내게 의견을 물었고 해외여행이 어려운 상황에서 다른 대안이 없었다.
이런 나에 비해 남편은 계획에 돌입하는 순간부터가 바로 여행이었다.
여행의 시작은 바로 인터넷 검색.
가려는 국립공원들 홈피를 찾아보고 그곳을 다녀온 사람들의 유튜브 찾아보기는 기본.
매일 저녁마다 동영상들을 보면서 사전 정보를 알아보고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점검했다.
반면 나는 옷가지와 약, 세면도구 챙기는 정도가 전부.
특히 이번 여행은 트랙킹이 주목적이라 옷가지도 두어 벌이면 족했다.
여행은 준비한 만큼 즐길 수 있는 것이라고했던가?
덤덤한 나에 비해 남편은 조금 흥분되어 보인다.
평소 몰고 있는 소형차와 달리 묵직한 중형 세단을 모는 손놀림이 부드럽다.
Salt Lake City에서 Green River까지 가는 동안 이야기가 많아지며 목소리의 톤도 조금 올라간다.
시간이 지나면서 남편의 여행에 대한 기대와 즐거움이 옆자리의 나에게 그대로 옮아온다.
그렇게 하룻밤을 보내며 우리 둘은 평소의 일상에서부터 즐거운 낯선 일상으로 점차 옮겨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잔뜩 기대에 부푼채 하루를 시작하는 남편에게 전화가 한통 걸려온다.
와이파이가 되는 숙소 탓이다. 일출을 보겠노라 한두 시간 일찍 오지로 들어갔다면 받지 않아도 되었을까?
전화는 한국의 시누이였다.
시누이는 두어 주 전에 요양원으로 들어간 시어머니와 혼자 지내고 계신 시아버지 문제로 전화한 거였다.
남편과 시누이의 통화가 한참동안 이어진다.
요양원에서 지내며 매일 아침마다 "내일이면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고집하고 계신 시어머니.
달라진 시어머니를 감당하지 못해 요양원 입소에 동의하고 혼자 지내기로 했다가 다시 혼자서는 못살겠다고 하시는 시아버지.
두 분의 거취에 대해 각기 다른 의견을 갖는 세명의 자식들.
전화가 길어질수록 나는 맥이 빠지기 시작한다.
한참 동안의 대화를 마치고 전화를 끊는 남편의 표정 역시 달라져있다.
방금 전에 보았던 환하고 활기찬 모습은 사라지고 낯빛은 회색빛으로 바뀌어져있다.
어려움과 즐거움이 공존하는 삶과 여행은 비슷하다.
옥죄는 일상을 애써 떨쳐버리고 나선 여행길.
오늘 펼쳐질 트래킹에서의 시간들로 밀어내버린 일상의 무게가 어느 순간 또다시 우리의 부푼 마음을 일순간에 사그라들게도 하는 것.
하지만 우리는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첫날을 시작하는 여행 일정에 집중하기로 한다.
공교롭게도 오늘 걸을 길은 이름부터가 "Devils Garden Trail"이 아닌가!
우리의 경쾌한 마음을 더없이 잦아들게 하는 악마같은 생각부터 걷어내 보기로 한다.
오늘 우리가 걸을 길처럼 그저 걷다 보면 해결될 삶의 어려움들일 것이라 생각하기로한다.
게다가 그 문제들을 이겨낼 힘을 얻고자 떠나온 여행이 아니었던가?
우리 둘은 등산화 끈을 단단히 동여매며 서로를 격려한다.
"그래, 여행과 인생은 참 많이 닮았어. 즐거움과 어려움이 공존하지. 함께 걸어가 보자고, 오늘 하루도."
( 4박5일간 짧은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바쁜 일상을 멈추고 낯선 곳에서 보낸 경험과 단상을 몇꼭지 써보려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