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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강 Apr 27. 2021

마지막에 내가머물고 싶은곳

어린 시절의 말과 음식이 있는 곳

"엄마, 엄마 아빠는 이민 1세대이잖아요. 은퇴하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서 사시는 건 어때요? 한국어로 말하고 맛있는 한국음식 맘껏 먹을 수 있는 곳, 제가 엄마라면 그렇게 할 것 같아요."


아이들이 한국 여행 티브이 프로그램을 열심히 보는 우리에게 하는 말이다.

저희들이 보기에 미국의 말과 문화에 서툰 우리들의 노후가 그런 한계 때문에 더 외롭고 쓸쓸해질 것이 걱정되나 보다.

아이들의 걱정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민자의 노년의 삶, 특히 케어를 받아야 하는 마지막 즈음의 삶에 다다르면 자신의 모국어와 자신의 소울 푸드가 있는 곳으로 회귀하고 싶어 하는 많은 분들을 본다.




할머니는 영어로 말하신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녀들과 영어로  대화한다.

아니 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녀들이 한국어를 못한다. 

많은 1.5세대나 2세대 자녀들이 이중 언어자들임을 생각할 때 할머니 가족의 경우는 좀 특별하다.

이유는 한 가지이다. 오래전 이민 온 할머니가 자녀들과 한국어로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20대에 미국에 오셨다고 했다.

우리나라 유수의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처음 계획은 유학 후 돌아가 전공대로 교육사업을 할 생각이었으나 한국의 정치 상황이 불안했다.

해서 할머니는 미국에 그냥 남았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어 자녀들을 낳았다.


60년이 다 되어가는 할머니의 이민 역사를 두고 볼 때 할머니의 결정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된다.

어디를 둘러봐도 아시안을 찾아보기 힘들었을 미국 이민의 초창기.

대학원을 다니며 영어에 익숙해진 부모는 자녀들의 언어를 영어로 결정했을 것이다.

한국어는, 동방의 가난한 작은 나라의 언어는 어디에고 쓰일 데가 없었을 테니까.

아니, 처음엔 아이들이 빨리 영어에 익숙해지도록 부모 모두가 집안에서도 영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보통의 미국 가정처럼. 

시간이 흘러 나중에는 간단한 한국말도 자녀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영어가 모국어로 채택된 자녀들의 두뇌에는 한국어란 배우기 어려운 외국어일 뿐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자녀들은 영어에 적응해갔고 집안에서조차 모국어인 한국어를 들을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세월은 할머니가 스스로 생활할 수 있을 때까지는 아무런 문제 없이 지나갔다.

그들은 어렸을 때처럼 엄마에게 영어로 이야기했고 엄마는 영어로 대답했다.

노쇠한 할머니가 자꾸 넘어져 병원에 입퇴원을 반복하게 되기 전까지는.


어느 날 우리는 빠른 영어로 이야기하는 이민 2세 자녀의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엄마의 우리 집 입소를 원했다. 

이유는 한 가지, 엄마에게 한국어와 한국음식을 제공해 드리고 싶어서라고 했다.


80대 후반에 접어든 할머니는 살던 곳을 떠나 딸이 살고 있는 주로 이사가 살고 있었다.

하지만 병고는 나이와 함께 찾아왔고 쇠약해진 몸은 수시로 넘어졌다.

몇 번의 낙상으로 머리에 여러 번의 손상을 입은 할머니는 더 이상 집에서는 생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딸은 고심을 했다. 

자신이 있는 곳엔 한국인이 운영하는 시설이 없었다.

널싱홈이건 어시스티드 리빙이건 할머니는 영어로 의사소통해야 했고 미국 음식을 먹어야 했다.

병약해진 할머니는 예전에 먹던 한국음식이 그리웠고 한국사람들과 부대끼며 살고 싶었다.

게다가 내가 있는 곳은 할머니가 젊은 시절 오래 살았던 곳이었고 할머니의 형제자매들이 살고 있었다.


그렇게 딸과 사위는 6시간 정도를 운전해 할머니를 우리 집에 데려왔다.

그날부터 할머니는 다시 한국어와 한국음식, 한국 케어기버가 있는 미국 속 작은 한국 홈에서 살게 되었다.

떡만둣국, 김치볶음밥, 소고기덮밥, 미역국, 고등어조림, 호박나물, 두릅전까지 할머니는 다 잘 드신다.

우리와는 한국어와 간단한 영어로 말하신다.

잘 드셨냐고 묻는 내게 "매끼마다 참 맛있게 먹었어요."라고 대답하시고,

잘 주무시라는 말에는 "Sweet dream."이라고 대답하신다.




할머니가 입소하신 지 삼일째다.

첫날보다 많이 편안해 보인다.

무엇보다 낯선 환경임에도 잘 적응해나가고 있다. 음식도, 우리의 케어도, 우리와의 관계도.


할머니는 마지막 삶터로 우리 집을 선택했다.

할머니의 쇠락해지는 기력이 자랄 때 먹었던 한국음식으로 북돋아질 수 있을까?

매 끼니마다 싹싹 비우시는 그릇들을 보면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할머니 옆에서 그의 옛날이야기를 묻고 대답해주는 나의 한국말로 할머니의 기억과 삶의 의지가 되살아 날 수 있을까?

점점 많아지는 할머니의 미소들을 보면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문득, 삼 일 전에는 뵌 적 없는 낯선 할머니의 고향사람이 되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들어주고 60여 년간 담아놓았던 못다 한 이야기들을 들어드려야 할 것 같다.

오랜 세월 즐기지 못했던 한국음식의 맛도 되찾아드려야겠다.

그러면 연어의 회귀처럼 할머니도 이곳을 자신이 태어나 자랐던 곳으로 느끼시지 않을까?

고향 같은 편안함을 느끼며 평온한 말년을 지낼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작은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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