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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천 Aug 16. 2021

1. 100일 동안 여행을 떠난다

[100일 여행] 인천 국제공항, 2015년 8월 12일

언제나 그렇지만, 여행을 떠나기 전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며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은 '그냥 그만두고 집에 갈까?'인 것 같다. 막막하고, 두렵기도 하고, 막상 떠나려니 귀찮기도 하니까 그냥 여기서 다 집어치우고 편안한 집에 가서 쉴까 하는. 인생에서 가장 긴 여행을 떠나려고 하는 순간에도 이 소심하고 나약한 생각은 여지없이 마음속을 휘저어놨다.


서유럽과 북아프리카에 있는 나라 15곳 정도에 들러볼 생각이다. 하루 이틀도 아닌 100일 동안 외국에 나가 있는 거다 보니 각 국가 간 비자나 유심카드 적용 구분, 소소하게는 수돗물 성분까지 공부해야 할 것들이 쏟아졌다. 모르는 걸 알아가는 과정은 즐거웠다. 나의 여정을 하나하나 조립해가는 것이 행복했다. 잠드는 시간을 자주 미루고 싶을 만큼.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기 싫을 만큼.

32리터 배낭 안에 꾸려 넣을 100일간의 여행 준비물

하지만, 막상 떠나려고 하니 역시나 겁이 난다. 100일이나 있어야 하는데 짐을 제대로 싼 건지 아닌지도 모르겠고, 가서 생각만큼 잘 놀다 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한 달쯤 전 IRP 계좌를 해지하고 주 계좌에 옮겨놓은 퇴직금과 그전부터 저축해놓았던 돈이 합쳐진, 꽤 두둑해 보였던 통장 잔고가 여행을 떠나기도 전에 무서운 속도로 줄어드는 걸 보면 지금 잘하고 있는 짓인가 불안하기도 하고.


꽤 많은 돈을 써서 오랜 기간 여행을 떠날 계획에 아버지께서도 못내 불안하신 눈치다. 나 또한 몇 달이나 일상에서 멀어지는 것이 겁나지 않는 건 아니다. 단지, 나이가 들어 지금보다도 더 겁이 많아지고 생각이 많아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많은 걸 보고 느끼고 싶을 뿐이다. 아직 안심할 수 있는 길에서 안전하게 지내고 싶지는 않다.

Lufthansa, Airbus A380-800

어쨌든 비행기는 떴고, 도착지인 프랑크푸르트로 날아가고 있다. 영화 두 세편 보다 보면 금방 갈 것 같다. 많은 불안을 안고 떠난다. 모든 여행이 그랬던 것처럼, 아마도 좋은 일만 일어나지는 않겠지. 정말로 막막하고, 두려울 거다. 하지만, 그만큼 재미있는 일도 일어날 거라는 걸 지금은 알 것 같다. 이 불안감도 뒤집어 생각해 보면 희망의 다른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아쉬워하는 사람들과 웃으며 작별 인사를 나눌 수 있었으니 행복한 한 때를 보냈다 할 수 있겠다. 4년 반 동안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그리고 제법 긴 여행을 떠나려 한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도저히 알 수 없다. 두렵고,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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