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여행] 더블린 → 글래스고, 2015년 8월 22일
원래는 더블린에서 페리를 타고 웨일스 지방의 홀리헤드에 내려 영국 여행을 시작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여차저차 실패해서 할 수 없이 글래스고행 비행기를 선택한 건데, 생각지도 못하게 평생 처음으로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보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새로운 탈것에 대한 경험을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다. 의외의 일이 항상 일어나는 것도 여행의 즐거운 부분이다.
영국은 '쉥겐 조약'에 가입하지 않은 나라라 입국 심사를 할 줄 알고 관련 영어 회화도 열심히 복습해 놨었는데, 의외로 별 심사 없이 공항 로비로 나올 수 있었다. 혹시 실수로 입국 심사대를 지나친 건가 싶어 잔뜩 긴장했지만, 무슨 일인지 별일 없었다. 지나가던 공항 근무자 분은 어리둥절해 미칠 것 같은 내 기분도 모르고 입고 있던 하늘색 노스페이스 재킷 좋다면서 해맑게 웃고 지나가고.
알아보니까 아일랜드랑 '공동 여행 구역(Common Travel Area, CTA)'이라는 조약을 별도로 체결해서 입국 심사가 없는 거라고 한다. 남의 나라에 상륙하자마자 사고 친 게 아니라 다행이었다.
버스를 타고 뷰캐넌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예약해둔 호스텔에 체크인하고 거리 구경에 나섰다. 호스텔 앞은 퀴어 퍼레이드가 한창이었다. 무지개 깃발을 흔들며 행진하는 사람들과 그 뒤를 졸졸 따라가는 구급차랑 경찰차를 잠시 구경하다가 마트에 가서 점심으로 1 파운드 짜리 빵을 사 먹었다. 1 파운드짜리 맛이었다.
글래스고 중앙역에 가서 내일 아침 출발하는 밀가이(Milngavie) 마을 행 열차표를 예약했다. '웨스트 하이랜드 웨이' 트래킹 코스의 출발점이다. 3파운드 30펜스. 겨우 30분 남짓 타는 거 치고는 비싼 편이었다. 열차표를 구입하고 나서 인포메이션 센터에 들러 웨스트 하이랜드 웨이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다. 혹시 텐트를 렌트해주는 시스템이 있을까 싶어 인포메이션 센터에 물어보니 그런 건 없다고 한다.
텐트도 그리 비싸지 않고 하니 돈도 아낄 겸 캠핑을 해볼까 싶었지만, 해보지도 않은 캠핑에 익숙해지기 위해 시행착오를 겪는 동안 웨스트 하이랜드 웨이의 경관을 감상할 여유를 잃을 것 같아 그만뒀다. 코스 중간중간에 호스텔도 제법 있는 것 같으니 별 문제없겠지.
잠시 다리도 쉴 겸 들렀던 광장에서 어떤 여자 여행자를 봤다. 한국이나 일본 쪽 사람인 것 같았다. 앞 뒤로 커다란 배낭 두 개를 짊어지고 다니고 있었다. 여행을 오래 한 듯 피부는 까무잡잡했고 검은색 단발머리는 결이 푸석해 보였다. 힘들 법도 했지만 지친 기색 하나 없었다. 호기심으로 가득 찬 눈빛이 굉장히 즐거워 보였다.
여행을 시작하고 나서 열흘 남짓한 날 동안 몇 달 수준이 아니라 몇 년 단위로, 대륙 사이를 떠돌아다니는 여행자들도 몇 명 만났었다.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을까? 즐거워 보이는 미소가 아직도 떠오른다. 난 사실 이런 배낭여행이 나에게 맞는 건가 고민이 많은데.
저녁으로 맛없는 영국 요리의 상징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피시 앤 칩스'를 먹어봤다. 하루 종일 또 다른 낯선 문화에 시달려서 그런지 너무 배가 고팠나 보다. 피시 앤 칩스는 그간 들어왔던 악평과는 달리 꽤 먹을만했다. 음식이 맛있어서 실망했던 건 또 처음이다.
호스텔 룸메이트의 반 이상은 저녁이 되자 밤을 즐기기 위해 나갔고, 몇몇 사람들만 내일의 여행을 위해 숙소에서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있다. 나도 후자 중 한 명이다.
내일부터 일주일 동안 154km를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