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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천 Sep 03. 2021

12. 여행을 계속하고 싶어진 날

[100일 여행] 밀가이 → 드리먼, 2015년 8월 23일

밥 먹고 지쳐 쓰러졌다가 아침에 일어나 전날의 일기를 쓴다.


아침 일찍 글래스고 중앙역을 출발해 밀가이에 왔다.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유명한 트래킹 코스인 '웨스트 하이랜드 웨이(WHW)'의 출발지다. 오늘부터 일주일 간 96마일(약 154km)을 걷는다.


출발 전에 입구 근처에 있는 인포메이션 센터에 들려 WHW 패스포트를 샀다. 코스의 포인트 마을 13곳에서 기념 도장을 받을 수 있는 스탬프 북인데, 진짜 여권 같은 건 아니지만 기념으로 갖고 싶었다. 평생 처음으로 해보는 트래킹인지라, 다 받을 수 있을지는 일단 걸어봐야 알겠지만.

이른 아침이라 적막하던 글래스고 중앙역
30분 정도 걸려 밀가이(Milngavie)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트래커들은 별로 없었다
밀가이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기념 여권을 샀다
웨스트 하이랜드 웨이 시작점 앞의 오벨리스크
로우랜드의 풍경은 생각보다 그리 색다르지는 않았다
웨스트 하이랜드 웨이 코스를 따라 박혀 있는 방향 표시 말뚝
방목되고 있는 소는 처음 봤다
기대했던 풍경이 조금은 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여는지 몰라 한참 바보짓했던 여닫이문
석회질 때문인지 물이 콜라색이다

스코틀랜드의 날씨는 듣던 것보다 화창했고, 웨스트 하이랜드 웨이는 생각보다 힘들었다. 한여름에도 제법 쌀쌀하다는 글을 보고 와서 청바지에 스웨터를 입고 출발했는데, 걷기 시작한 지 30분도 안 돼서 땀에 흠뻑 젖어 얇은 옷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오늘의 도착지인 드리먼까지 12마일밖에 걷지 않았는데도 완전 녹초가 되어버렸다. 계속 어깨가 쑤시던데, 배낭 메는 방식에 문제가 있나 보다.


솔직히 드리먼까지 오는 내내 힘들고 지루했다. 이게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여행이 맞는 건가 고민이 많았다. 생각해보면 지난 열흘 남짓한 시간 동안 비슷한 고민을 했던 것 같다. 배낭여행은 생각보다 번거롭고 힘든 순간이 많았다. 이게 정말 내가 꿈꾸던 배낭여행의 본모습이라면, 굳이 애써 계속할 필요가 있을까? 이럴 시간과 돈으로 더 재미있는 걸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사실 드리먼에 도착할 때쯤에는, 이 의미 없는 걸음을 그만두고 돌아가고 싶다는 쪽으로 마음이 완전히 기울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드리먼이 내려다보이는 어느 언덕에 멈춰 서게 되었다.

아무도 없는 언덕 위에는 웨스트 하이랜드 웨이 코스라는 걸 표시하는 나무 말뚝 하나만 서 있었다. 푸른 하늘 아래 평화로운 로우랜드의 경치가 펼쳐졌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이마에 맺힌 땀과 함께 길을 걷는 내내 떠올랐던 온갖 상념을 품고 사라져 갔다. 바람결에 풀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어깨를 짓누르던 배낭을 내려놓고 한동안 눈앞에 펼쳐진 경치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평화로운 침묵을 즐겼다. 어쩌면, 이 풍경을 눈에 담기 위해 여행을 떠나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담한 마을이었던 드리먼(Drymen)
간신히 잡은 오늘의 숙소

숙소 예약을 하지 않고 왔던 탓에, 드리먼을 한참이나 배회한 끝에 겨우 빈 방을 하나 구하고 오늘의 걸음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글래스고 같은 대도시랑 달리 숙소 잡기도 힘들고, 어지간한 먹을거리도 다 비싸서 고민이다. 아고다 앱에서는 코스에 있는 숙소가 거의 뜨지 않아 예약은 전화로만 해야 할 것 같은데, 지금 끼워놓은 유심으로는 전화도 되지 않아 아무래도 일주일 내내 애 좀 먹을 것 같다.


하지만 오늘 언덕 위에서 두 눈에 담았던 그런 경치를 또 볼 수 있다면. 그런 감동적인 순간이 또다시 찾아온다면. 앞으로 찾아올 또 다른 고생을 감수해도 괜찮지 않을까?


여행을 계속하고 싶어진 날. 계속 걸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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