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9일. 학교 근처 PC방이 대학생들로 가득 찬 오늘은 A 대학의 수강신청 날이다.
8시 59분 29초, 30초, 31초...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학생들이 조용히 마우스에 손을 올린다. 링크 시계가 9시를 알리자 콘서트 티켓팅을 방불케 하는 딸깍딸깍 마우스 소리.
10초 남짓한 수강 전쟁이 끝난 후 누군가는 환호하고, 누군가는 한숨을 쉬고, 그리고 누군가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그 속에서 유유히 성공한 한 명이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지수현. 수현은 A 대학 심리학과에 재학 중이다. 학점관리도 지쳤고, 수업도 힘들지만 휴학할 용기가 없는 그녀는 3학년 1학기도 다니기로 했다.
그런 그녀에게 동기가 조용히 추천해 준 수업 하나, 바로 A 대학의 숨겨진 꿀과목. ‘삶, 철학적 이해’.
이름 탓에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이 과목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선 경쟁이 꽤 치열하다. 시험도 조별과제도 발표도 없고, 그저 pass/fail만 있는 수업이기에.
동기로부터 이 소식을 들은 수현도 이번 학기 ‘삶, 철학적 이해’를 신청했다.
어느새 만개한 벚꽃이 봄바람에 휘날리는 4월. 따스한 햇살이 강의실로 쏟아진다. 수현은 오늘도 조용히 강의실에 들어와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이하늘.... 김준호.... 지수현.... 정한성, 정한성 학생 안 왔나요?....”
오후 1시, 오늘도 교수님의 출석과 함께 수업이 시작됐다.
언제나처럼 교수님은 질문으로 시작한다.
“우리 모두의 시간은 같나요, 아니면 다른가요?”
“같죠.” “같습니다.” “같아요.”
학생들이 자신 있게 말했다.
“맞아요, 억만장자든, 대통령이든 모두 다 하루에 24시간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물론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고요.
그렇다면 질문을 살짝 바꿔보죠. 하루에 24시간이란 것은 절대적인 수치죠, 그럼 하루의 가치는 어떤가요? 그 가치도 수치처럼 모두 다 동등한가요?”
앞 질문과 다르게 강의실에 흐르는 정적.
몇 초가 흘렀을까, 그 정적을 깨는 교수님의 목소리가 강의실에 울려 퍼진다.
“이 질문을 던진 건 남과 나를 비교하자는 게 아닙니다. 그저 나는 내 시간의 가치를 어떻게 매기고 있는지 이야기해보고 싶을 뿐이에요.
잠시 여러분의 어제 하루를 떠올려보세요. 그리고 지금 나누어주는 종이에 그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적어봅시다.”
사각사각 저마다 종이에 무언가를 적고 있다.
수현도 펜을 들고 종이에 어제 자신의 하루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9시부터 12시까지 수업을 들었고, 점심을 먹은 뒤 3시까지 낮잠을 잤고, 잠시 과제를 하다가 저녁에 친구를 만났다고 적었다.
“자, 이 정도면 시간을 충분히 준 것 같으니 다시 이야기를 해보죠.
여러분은 어제 하루 무엇에 시간을 썼나요?
만약 어제가 여러분의 마지막 하루라면 후회하지 않을 하루를 보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나요? 아니면 종이에 적힌 하루와 다른 하루를 보낼 건가요?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우리 모두에게 매일 똑같이 24시간이 주어지지만 사람마다 그 시간을 다르게 쓰죠. 다시 말해, 우리 스스로 시간의 가치를 결정했고, 그 결과로 여러분은 지금 그 종이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럼 다시 질문을 해보죠.
여러분의 오늘은 어제와 동등한 가치를 가지길 바라나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여러분이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보낼 것인지에 달려 있겠죠.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또 어떻게 시간을 쓰고 싶나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레포트로 듣겠습니다. ‘삶의 마지막 1년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하겠습니까?’라는 주제로, 레포트 써서 4월 28일 수업 때 제출해 주세요. 그럼 오늘 수업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에필로그]
어둠이 내려앉은 새벽 3시, 모니터에서 나오는 빛이 방을 희미하게 밝힌다. 빛나는 화면 앞에 비치는 검은 그림자, 수현이다. 지난 시간 교수님이 주신 레포트를 쓰고 있는 그녀, 그녀는 과연 무엇을 쓰고 있을까.
“꿈이 없었다. 그냥 성적에 맞춰 이곳에 왔고, 용기가 없어 그저 3학년이 되었다. 나에게 마지막 1년이 주어진다면 나는 새로운 나를 찾고 싶다... 반년은... 반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