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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업본부장 한상봉 Sep 16. 2023

내가 잠시 영업을 쉬는 이유(급성당뇨가 준 선물)

영업사원의 일상과 가족

내가 잠시 영업을 쉬는 이유(급성당뇨가 준 선물)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어느 것부터 말씀드릴까요?"

"나쁜 거부터 듣겠습니다."

"급성당뇨가 오셨습니다. 평생 관리할 각오를 하셔야 할 듯요."


휴... 당뇨병이라니. 아니 왜? 난 가족력도 없는데?


"좋은 소식은 뭔가요?"

"다행히 초기에 잘 관리되면 약으로 관리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슐린을 계속 맞지는 않으셔도 될 거 같아요."


30년, 40년, 많게는 50년 이상 열심히 한 가지 일을 계속하는 사람들도 많다. 몇십 주년 기념 콘서트를 하는 가수들, 어묵만 30년 넘게 만들어 온 장인들. 그분들에 비하면 짧지만 그래도 20년을 해온 영업사원으로서의 삶이 준 마지막이, 선물이 아니라 경고라니.


하루 세 번 인슐린주사를 맞아야 했고, 당수치검사를 위해 거의 매일 내 피를 봐야 하는 집중관리기간을 거쳐야 했으며 약으로 조절이 가능한 시기에도 식단관리는 필수적으로 병행해야만 했다. 7시를 넘어서는 그 어느 것도 먹을 수 없었고, 흰쌀밥은 물론 그 좋아하던 라면도 먹으면 안 됐다.


영업사원으로서의 생활은 불가능했다. 일반 직장인도 힘들 수밖에 없는 이런 병을 가지고 영업을 하는 건 마치 탁구공으로 축구를 하는 것처럼 어색한 일이니까. 난 브레이크가 필요했다. 양평은 그런 나에게 자연에서의 새로운 즐거움을 떠안기고 품어주었다. 경고가 선물이 된 것이다.


아내는 정원을 가꾼다. 반은 우스갯소리로 보건교사는 부업이고 정원사가 본업이라고 생각하는 여자다. 정원을 가꿀 때 행복해한다. 작은 씨앗을 뿌리고 삽목을 하면서 돌본 식물들이 무성해지고 예뻐지면 즐거워한다. 그리고 평생 해도 좋을 만큼 설레는 일이라고 한다. 어찌 보면 본업이 정원사라는 아내의 말은 틀린 게 아닌 듯하다.


워낙 소녀감성이 그대로인 여자라 꽤나 잘 어울리는 취미이다. 학교 근무하는 틈틈이 플로리스트와 원예치료사 자격증을 딸 정도로 열심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본질적인 건 돌보고 가꾼 식물들이 아름답게 배치되고 때가 되면 꽃을 피우는 일이라고 한다. 계절에 따라 그 계절에 가장 어울리는 정원을 만들겠다는 기대감과 실천이 마치 레고를 조립하는 아이 같다.




난 식물에는 관심이 없다. 움직이는 동물만 관심이지 예쁜 꽃, 멋있는 나무, 가꿔진 정원 이런 건 큰 감흥이 없었다. 그런데 나이 오십이 넘어서 그리고 생각지도 않던 큰 병이 오고 나서, 왜 사람들이 정원을 가꾸는지, 정원이 없으면 좁은 아파트 베란다라도 활용하려고 하는지, 왜 굳이 회사책상에 화분하나라도 놓으려고 하는지 깨닫고 있는 중이다. 이건 무슨 꽃이고 이건 어디에 심어야 하고 이런 아내의 말을 자꾸 들으니 나도 모르게 조금씩 외워지더라. 마치 새로운 제품이 출시되어 제품공부를 할 때, 아무리 해도 안 외워질 거 같은 깨알 같은 제품의 기능이 고객을 만나야 하는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든 기억이 나서 설명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신기했다. 아내는 더 신기해했다. 내가 관심이 없는 걸 아니까 그냥 혼잣말하듯이 해주는 말인데 내가 기억하는 걸 보고 재밌어한다.



사람이 재미를 느끼고 열정을 가지면 저렇게까지 하는구나 라는 걸 아내를 보며 새삼 느낀다. 아내는 출근 전 두 시간을 먼저 일어나 정원을 가꾸고 출근을 한다. 물을 주고 잡초를 뽑고 삽목을 하고 거의 아침시간 두 시간을 정원에 투자하고 아쉬운 표정으로 출근을 한다. 이 재미를 몰랐으면 어떡할 뻔했냐고 가슴도 쓸어내린다. 부러운 일이다. 그런데 한 가지 재밌는 게 있다. 옛날에 나도 회사 다닐 때 출근하기 전 두 시간정도는 영어학원을 다닌 적이 있었다.(그때 회사원들은 참 영어학원을 열심히 다녔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근데 단 한 번도 영어를 더 하고 싶어서 아쉬워한 적이 없었는데 아내는 거의 군대 가는 애인과 헤어지는 표정이다. 그것도 매일 군대를 보내는 중이다.



NASA에서 걸레질을 하는 청소부에게 무슨 일을 하냐고 물었더니 인간을 달에 보내는 일을 한다고 자랑스러워했다지. 아내는 구글 어스로 보면 점으로도 찍히지 않을, 하지만 틀림없는 지구의 한 표면을 더 아름답게 바꾸는 일을 한다고 자랑스러워한다. 아주아주 인상적인 멘트다. 요즘도 차를 타고 가다가 담배꽁초를 어떻게 버릴까 고민하는 나 같은 부류의 인간들에게는 거룩하기까지 하다. 그런 아내의 뒤에서 삽을 들고 허드레 시다바리를 하는 건 오늘도 즐거운 일이다. 이게  내가 왜 어떻게든 일을 마치고 빨리 집으로 가고 싶어 하는지에 대한 대답이다. 참고로 집에 몇 십 년째 꿀단지는 있은 적이 없다.




사족 : 1차 술자리에서 이미 충분히 달린 뒤 계산을 마치고 나와 술집 앞에서 어정쩡하게 모여 담배를 피우는 바로 그 애매한 시간, 영업사원들에게, 아니 회사원들에게 있어 금기시되는 말이 있다. 서로 얼굴을 쳐다보다가 누군가가 외치는 "인생 뭐 있어?"


다들 무슨 돌림노래하듯이 복명복창한 뒤 2차로 달려가는 바로 그때, 사랑하는 후배 영업사원들이여! 한 번만 자신의 건강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 고객을 만나서 접대를 하면서 내일이 없을 것처럼 술을 마실 때도, 바닥에 토해놓은 모텔 침대에서 잠을 잘 때도 습관처럼 자신의 몸과 가족을 생각해 주기 바란다. 실적이 좀 나빠도 된다. 내년에 좋아지겠지. 아니면 후년에 좋아지면 되지. 하지만 몸은 꼭 챙기길 바란다. 가끔 고객을 만나는 꿈을 꾸기도 하고, 지금도 수주가 결정되어 동료와 얼싸안고 춤을 추기도 했던 그때가 그리운 못난 선배의 간절한 부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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