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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발표회의 모든 것 (게임이론 실사화 버전이 이곳!)

영업사원 실전노트

by 영업본부장 한상봉

제안발표회의 모든 것 (게임이론 실사화 버전이 이곳!)


종합예술, 시각화, 대본, 관객


네 개의 키워드에서 무엇이 연상되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나 연극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영업사원은 그래서는 안된다. 영업사원은 이 단어들에서 '제안발표회'를 연상해야 한다.


일반인들은 단어만으로 알듯 말 듯하다는 느낌일 것이다. 뉘앙스는 학예회 같은데 어른들이 하는 것이니 무언가를 제안하는 자리인 거 같고 정확히 뭐지?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영업프로세스의 모든 것에서 제안발표회야 말로 가장 중요한 꼭지임을 언급한 적이 있다. 영업사원의 입장에서 제안발표회는 최종 우선협상대상자가 되기 전 바로 전단계 절차이고 그동안의 영업과 제안작업을 통합하여 마무리하는 자리기 때문에 가장 큰 에너지와 집중을 요하는 행사이다. 이제 제안발표회의 풍경을 그려보자.


얼마 전 종영한 '대행사'라는 드라마에서 제안발표회 장면이 한 챕터로 표현되는 걸 재밌게 봤다. 요컨대 '제안발표회'는 고객에게 우린 이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약속하고 보여주는 자리다.


제일 긴장되고 기분이 불편한 것은 하루에 모두 제안발표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죽지 않으면 죽여야 하는 게임이론 중 범죄자의 딜레마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분위기에서 경쟁업체들이 다 한 장소에서 모여 대기를 한다는 점이다.


안면이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개는 생소할 수밖에 없고 인사를 나누는 것도 서로 어색한 묘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상대의 제안서 표지가 더 멋있으면 그것도 불편하고, 우리 회사보다 크고 레퍼런스도 많은 회사가 같이 제안하고 있는 걸 보는 것도 짜증 난다.


자 이제 발표의 시간이다. 대개 모든 회사에게 동일한 발표의 시간과 질의응답의 시간이 주어진다. 문제는 발표순서다. 이건 보통 제안서를 제출한 역순이거나(제안서는 제안발표회 보다 먼저 제출하는 게 일반적이다) 제비 뽑기를 하기도 하는데 내 경험으로는 첫 번째 발표하는 것이 가장 나았다.


일단 첫 번째 발표 때는 심사위원들의 집중도가 높다. 심사위원들도 사람이다 보니 한회사에 보통 30분 가까이 몇 개 회사를 심사하다보면 물리적으로 지치고 집중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게 장단점이 있는데 제품에 자신이 있거나 발표에 자신이 있을 경우엔 장점이 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첫 번째의 장점은 이것이다. 보통 심사위원들이 제안업체에 질문하는 항목이나 내용은 많은 부분 동일하다. 같은 기준에서 차별을 두기 위해서인데 첫회사는 질문에 대한 답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같은 질문을 한 게 첫회사보다 못하다면 그 반대인 경우보다 체감하는 마이너스가 더 크다. 첫 번째 회사는 이렇던데 이 회사는 이렇군요 라는 느낌이 보통은 플러스보다는 마이너스일 위험이 더 높다.


내가 H교육정보원 영업을 할 때였다. 교육관련된 솔루션을 도입하는 사업이었는데 만약 수주한다면 전국의 모든 학교에 제품이 공급될 수도 있는 당장의 떡보다는 미래가치가 무궁무진한 너무 중요한 프로젝트였다.


회사입장에서는 무조건 수주해야 하는 사업이었지만, 아쉽게도 사전영업이 경쟁사보다 늦어 일단 기관의 사업담당자는 대놓고는 아니어도 우리 회사보다는 경쟁사를 염두에 두고 있는 불리한 운동장위에서 제안발표회가 진행되었다.


그때 우리 회사의 킬러제안포인트는 RFP 즉 제안요청서에서 요구한 시범사이트 운영계획이었다. RFP에서는 2개 정도의 학교에서 운영을 해야 한다고 못 박았고 사실 2개를 운영하는 것도 좀 무리한 부분이라고 여기던 차에,


난 무조건 따야 한다는 영업사원의 심정으로 시범운영 사이트를 10개로 제안하자고 주장했고 제안서에도 그렇게 관철되어 제출했다. 당연히 심사위원들은 공격적으로 질문을 퍼부었다.


제안설명회 풍경은 이렇다. PPT 발표를 하는 사람은 보통 영업사원이 아니라 기술적으로 지식이 있는 제안서 제작 총괄 책임자, 즉 사업관리팀 팀장이 담당한다. 그리고 나올 수 있는 여러 가지 질문들을 대비해 영업사원과 기술개발자. 그리고 제안의 신뢰와 성의를 보이기 위해 사장님이나 부사장님이 배석하는 구조다.


- 심사위원 : 아니 지금 제안서를 보니 시범운영을 10개 사이트에서 하겠다고 하셨는데 이게 가능합니까? 허위 제안 아닌가요?

- 당황한 발표자 : 아... 그건 다시 말해서....


난 그때 바로 지금이 수주여부를 결정짓는 별의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배석자리에서 주저 없이 벌떡 일어났고 이미 충분히 준비되었다는 톤으로(다 내 뇌피셜이다) 말했다.


- 절박한, 그러나 아닌척하는 영업사원 : 만약 시범운영하는 기간이 3개월만 됐어도 그런 제안을 못 드렸을 겁니다. 하지만 한 달이라면, 이 프로젝트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회사전체가 절감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회사의 일정을 조절하여 직원들이 합심한다면 10개 운영 가능합니다.

- 납득한 심사위원 : 아.. 그렇군요. 그렇다면 가능할 수 있겠네요.


게임은 여기서 끝이 났다. 왜냐면 다음번 유력했던, 그러나 시범운영을 2개로 제안했던 경쟁사에게 심사위원들은 똑같은 질문을 했고 준비되지 않고 절박함을 어필하지 못한 그 회사는 제대로 답을 못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우리는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고 유력했던 경쟁사 영업사원은 회사에서 무지하게 혼이 났다는 후문.


순서가 먼저일 때, 그리고 순발력 있는 영업사원을 가졌을 때 얻는 최고의 이익을 가져온 것이다.(그 한 달 멘트는 내가 즉석에서 얘기한 것이다. 전혀 사전에 논의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부사장님은 그날 저녁 소고기를 사주셨고, 다음번 연봉협상 때 앞자리를 바꿔주겠다고 약속하셨다.ㅎ)


사실 비슷한 수준의 회사들이 쓰는 제안서는 큰 차별을 주기 어렵다. 일단 외부심사위원들은 일반적으로 심사당일날 초빙되어 온 것이라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본제안서를 읽을 시간도 여유도 없다. 결국 요약본이나 PT에서 점수를 매기게 되는 데 알다시피 발표나 발표자료나 수준은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에 사전영업된 회사가 보통 수주를 하게 되지만 위의 예처럼 드라마 같은 일도 생기기 때문에 영업이 매력 있는 것이다.


글로 쓰여진 수백 페이지의 제안서보다 멘트 하나가 더 효과적인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내가 연세대학교 도서관 문서보안 시스템 영업을 할 때이다. 그때는 나름 공정한 담당자 덕에 누구 하나 기울어지지 않은 상태여서, 제안발표회가 승부를 가른다고 분석된 프로젝트였고 그래서 더 그날 긴장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난 인복이 많다. 수없이 나와 함께 사선을 넘었던 사업관리팀의 팀장은(개인적으로는 제일 친한 대학동창이기도 하다) PT 발표전 인사말처럼 이런 멘트를 날렸다.

"제가 한양대학교 화학공학과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후기로 들어간 거였고 진짜 가고 싶어서 전기에 쓴 곳은 연대 금속공학과였는데 떨어졌거든요. 사실 그동안 연세대학교는 부아가 나서 안 좋아했는데 오늘 와서 발표를 하게 돼 영광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결과가 좋아서 제 PTSD가 치료됐으면 싶습니다. 훗"


난 아직도 흐뭇하게 미소 짓던 도서관 고위 관계자분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프로젝트는 당연히 우리가 가져왔다.


위의 멘트는 아주 곱씹어 볼 요소들이 많다. 길지 않으면서 그리고 있을 수 있는 상황을 설정해서 당신들이 나보다 나은 곳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고 내가 속하고 싶었던 곳에 제안을 하니 더 열심히, 성의껏 프로젝트를 할 것이라는 은연중의 열정을 보여준 것이다. 우리가 프로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자연스럽고, 스며든다.

제안발표를 하고 나서 대기실로 들어오면 용기 있는 경쟁사 영업사원은 질문한다. '뭐 물어봐요?' '깐깐해요?' 등등. 하지만 답을 해주겠는가? '아효, 땀나던데요?' '대답 잘하셔야겠어요. 저희는 망했어요.' 등등.


영업은 게임이론으로 치면 제로섬게임이다. 존 내쉬의 '범죄자의 딜레마' 이론처럼 서로 격리된 곳에서 정보 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한 명은 살고 한 명은 죽는 게임이다. 서로 의견을 말할 수 있고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으면 한 명이 100을 갖고 한 명이 0을 갖는 게 아니라 50씩 죽지 않을 정도로 나눠 가질 수도 있는데 그러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그 결과를 알기 위해 글래디에이터가 되어 싸우는 콜로세움이 바로 제안발표회장이다. 영업사원은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한다. 언젠가 나도 칼 들고 싸우는 검투사가 아니라 술 마시며 환호하는 관객이 돼보고 싶다고. 하지만 공무원이 된 지금 난 아직도 그 시절이 가끔 그립다. 오늘은 '수주축하드립니다'라는 문자를 받고 얼싸안았던 친구도 보고 싶다.



사족 : 제안PT장의 분위기는 사뭇 비장하다. 기본적으로 트집을 잡기위해 혹은 검증하기 위해 모여있는 사람들앞에서 자신감을 갖고 말을 하는 건 쉬운일이 아니기에 긴장과 비장의 분위기가 장내를 휘감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국감장이나 청문회처럼 일방적으로 누군가를 몰아세우거나 대답할 기회를 주지 않고 혼자 떠드는 일은 없다. 최선을 다해 자기의 의견을 개진하고 자신감을 표현하는 사람과 최선을 다해 그걸 검증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기싸움이 있을 뿐이다. 영업하는 내내 그 기싸움을 즐기려고 애를 썼지만 결과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큰 좌절을 주기에 온전히 그럴수는 없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엔 더할수 없이 짜릿한 경험을 하기에 오늘도 많은 영업사원들이 내가 이길거라는 확신으로 PT장에 들어선다. 승자와 패자 모두에게 축하와 위로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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