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업사원 실전노트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이 있다. 주로 복지정책을 요약할 때 쓰는 말인데, 영국어디선가는 더 강조하기 위해서 태아부터 천당까지 라는 말도 쓰기도 한다.
영업프로세스에 대한 글을 쓰면서 과연 영업의 영역은 범위는 어디까지 일까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봤다. 이미 영업을 하고 있는 영업사원들은 몸으로, 감으로 알고 있는 거겠지만 영업을 갓 시작한 영업사원들, 특히 기술영업을 하고자 하는 분들은 한번쯤 정리할 필요가 있다.
1탄에서 사업기획부터 수주까지의 프로세스를 살펴봤다. 편의상 큰 단락으로 구분했지만 그 단락 사이사이, 전후 측방으로 얼마나 보이지 않는 영업의 숨결이 더해지는 지 모른다. 이제 일반적으로 영업에 성공했다고 얘기하는 수주(우선협상대상자 선정)이후에 발생하는 프로세스를 살펴보자. 모르는 사람들은 이미 영업이 끝난거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어떻게보면 꾸준히 영업을 성공하는 영업사원이 되기 위해서는 수주 이후의 내용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6. 기술협의
이제 수주축제의 장에서 터뜨린 샴페인의 김이 다 빠졌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할 시점이다. 그럼 기술협의는 어떤 절차일까?
고객이 업체에게 발송하는 발주서는 공식적인 문서다. 계약서는 더하다. 거기에는 살짝 입장도 바뀌어서 이제 갑이 특별한 이유없이 계약을 취소하면 받을 수 있는 불이익까지 넣기도 한다. 그래서 갑은 계약전에, 발주전에 아주 치밀하고 꼼꼼하게 우선협상대상자를 검증한다. 그게 기술협의이다.
기술협의 절차때는 당연히 개발팀 혹은 사업관리팀이 주인공이 된다. 고객들도 때로는 부서가 바뀌어 전문적으로 그 제품이나 프로젝트를 회사에 활용할 부서 사람들이 배치된다. 이제 빨간 머리띠만 안 묶었다 뿐이지 조금이라도 투입리소스(인력이 될수도 시간이 될수도 있다)를 줄이고자 비장하게 앉아있는 을과 같은 값이면 조금이라도 더 얻어내고자 하는 갑의 팽팽한 일전이 벌어진다.
근데 실상은 그냥 웃기다. 거기에 영업사원이 MSG처럼 가미되면 더 웃겨진다.
"봉팀장, 이번 프로젝트에 왜 당신네 회사에서 파는 그 제품있잖아. 그거 하나만 더 설치해줘."
"와우 감사합니다. 수석님. 발주는 언제 주실거에요?"
"아.. 왜이래 봉팀장. 이번 프로젝트라고 했잖아. 어떻게좀 안돼?"
"수석님 회사에 자리 하나 비었어요? 저 거기로 가면 되요? 왜이러세요 회사분위기 알면서. 그냥 추가로 더 구입하는 걸로 하시죠."
난 영업이 좋다. 저기 한 구석 회의실에서는 코딩 좋아하고 숫자 좋아하는 이과생들이 이 기능은 어떻고 저건 어디에 설치하고 이런 재미없는 얘기를 하는 동안 영업사원은 이렇게 다음을 생각하는 것이다.
기술협의에서 크게 문제되는 경우는 없다. 이미 RFP를 통해서 무지하게 분석된 제안이고 고객도 그 이상을 요구하는 건 무리라는 걸 안다. 그리고 우선협상대상자를 바꾸는 건 고객의 입장에서도 부담이다. 잘 흘러갈 수 밖에 없다. 이제 기술협의는 끝났다. 계약으로 넘어간다.
7. 계약 체결
대부분은 표준계약서 양식이 있다. 거기에 고객의 이름과 금액, 그리고 그 제품이나 프로젝트에만 들어갈 수 있는 특별한 내용들을 추가하면 된다. 처음 고객에게 팔린 제품이 아니라면 표준계약서에서 크게 벗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계약이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유지보수조건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물론 유지보수계약은 실제 유지보수를 진행하게 될때(도입후 보통 1년이나 2년 후) 체결하겠지만 조건은 계약서에 명기한다. 제품가의 몇%를 유지보수 비용으로 책정할 것인지, 유지보수 책임행위에는 어떤 것까지 포함하는지, 제품의 업그레이드는 유지보수에 포함되어 무상으로 진행되는지 등의 조건 말이다.
보통 골드, 실버, 브론즈 같은 리그오브레전드 티어같은 명칭으로 그 등급을 구분하기도 하는 데 등급에 따라 10~20% 정도의 도입가 포션을 차지한다. 다 그런 경우는 아니지만 유지보수등급을 높게 체결하게 하는 것에도 영업사원의 두번째 입김이 불어진다. 그때는 개발자 또는 사업관리자와의 합동공격이 효과적이다. 유지보수는 기술적인 내용이라 아무래도 영업사원이 혼자 공격하는 것은 장사꾼 같은 느낌을 줄 것이다.
계약서에 날인을 하는 것도 중요한 경험이다. 보통 새내기 영업사원들이 가장 많이 놓치는게 그냥 계약서 마지막 회사명 (인) 여기에만 도장을 찍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건 부동산 전세계약때도 꼭 알아야 하는 일인데 항상 간인을 찍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고객사도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영업사원이 간인을 찍는 걸 모르거나 까먹으면 좀 쪽팔린 일 아닌가?
2부의 계약서를 붙이고 반씩 갑과 을의 도장을 찍는 것 외에 각 페이지 앞뒤에 갑을의 도장이 다 찍혀야 한다. 큰 프로젝트의 경우엔 계약서가 수십페이지가 되기도 하기 때문에 힘들거 같지만 이건 감격과 기쁨의 고통이다. 손가락이 부르트고 빨간색으로 뒤덥혀도 힘들지 않다. 이런 고통이라면 얼마든지 매일같이 겪어도 상관이 없다. 하지만 너무 아플때도 있어서(ㅋㅋ) 만인주를 쓰거나 펀칭같은 걸로 한번에 간인을 찍는 경우도 있다.
계약서에는 프로젝트 대금의 지급방법도 언급한다. 보통 선금, 중도금, 잔금의 형태일텐데 전체 금액의 몇%이냐를 정한다. 고객사의 내규가 있겠지만 유돌이를 발휘하여 가능하면 선금과 중도금의 포션이 높도록 하는 영업사원의 세번째 입김을 분다. 선금 40, 중도금 40, 잔금 20 이면 대만족이다.
이제 계약이 끝났다. 한부씩 나눠가졌고 난 자랑스럽게 경영지원본부에 계약서를 제출한다. 이젠 진짜 실전이다. 앞으로의 프로세스에는 고객과의 영업 뿐 아니라 내부의 사내영업도 가미된다. 영업사원의 보이지 않는 영업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제3탄에서 순환되는 영업의 미학을 계속 얘기해 보자
사족 : 처음으로 수주에 성공하여 위에서 말한 과정을 거치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던 날. 물심양면 도와주셨던 팀장님은 내가 직접 날인하도록 배려해 주셨다. 이게 좀 웃길지 몰라도 도장잡은 손을 떨게 되더라. 어디에 날인을 하면 되는 지 다 알지만 혹시라도 잘못 찍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도 했던 것 같다. 잘못 찍어도 다시 출력하면 되는데 왜그리 긴장했을까? 아마도 앞으로의 영업여정이 드디어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리라. 그 후로도 수없이 많은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지만 처음 계약하던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그날 계약을 마치고 어디서 토했는지도 다 기억이 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