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슬로우는 피라미드처럼 위의 다섯 개 욕구가 단계적으로 또는 순서대로 발현된다고 주장했지만,영업에서는 그 법칙이 통용되지 않는다.
영업을 할 땐, 아니 고객은영업을 진행하는 모든 단계에서 5개의 욕구가 수시로 순서 없이 발현된다.고객에게 가장 낮은 단계의 욕구에서부터 가장 높은 단계의 욕구를 수시로 자극하면서 내 제품이, 내가 제안하는 사업이 가장 그 욕구를 채워줄 수 있다는 시그널을 보내고 보여주고 입증해야 한다.
노점상이 거리에서 물건을 팔 때도, 외제차 영업사원이 1억 원이 훨씬 넘는 슈퍼카를 팔 때도, 사용하는 단어와 금액의 규모만 다를 뿐 기본틀은 다르지 않다.당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함과 동시에 더 높은 욕구도 채워줄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진 제품이나 사업이란 걸 영업의 초기단계에서부터 마지막 수주를 결정지을 때까지 끊임없이 어필해야 하는 것이다.
규모가 크지 않거나 사기업인 경우에서의 영업 또는 구매프로세스는 단순하다. 필요한 제품에 대한 견적서를 N개의 업체로부터 받은 뒤 비교견적을 하고, 내부검토를 거쳐 최종공급가를 결정하고 발주한다. 영업사원은 납품기한, 가격, 유지보수조건등을 포함한 계약서를 준비하여 계약하고 제품을 공급한다. 단계도 많지 않고 길지 않을 수 있다.
다만,큰 규모의 사업이거나 제품도입일 경우 보통은 아홉 단계의 영업프로세스를 거치게 되는 데 특히 공공영업의 경우엔 이 프로세스가 일반적으로 통용된다.
이제 순서대로 9단계의 영업프로세스를 살펴보자. 핵심주제는 그 정해진 프로세스에서의 영업사원은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가가 될 것이다.(사업에 따라서 단계는 더 추가될 수도 줄어들 수도 있다)
1. 사업기획
이건 중앙정부나 더 상위 지자체에서 지침이 내려올 수도 있고 기관 자체적으로 추진할 수도 있다. 이 단계는 아주 흐릿한 청사진 정도의 기본설계이고 당위성 정도만을 공유하는 정도의 낮은 단계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대략적인 사업의 규모나 예산의 규모를 예상하는 작업을 거치기 때문에가능하다면 영업사원은 사업기획단계에서부터 조인하여 대략적인 자문을 수행하길 희망한다.하지만 사업을 기획하는 기관의 주체와 사전에 교류가 있지 않으면 그건 쉽지 않다. 그래서 공공영업을 하는 회사는 오랫동안 영업을 해온 영업경력자를 우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 RFI 작성
RFI는 Request for information의 약자로 고객 내부적으로 이러이러한 것을 하겠다고 문서나 도식으로 정리를 하는 단계이다.대개 이 단계에서 영업이 강하게 들어간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나름 이제 디테일하고 전문적인 내용으로 정리가 돼야 하는 단계여서 공무원 혹은 고객의 지식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표면적으로는 고객 내부에서 공유하는 자료지만 사실상 외부에서 만들어 주는 자료인 것이다. 그래서 영업사원은 이 RFI에 자기 회사의 제품이 조금이라도 더 쉽게 채택되기 위한 갖은 방법을 동원한다. 너무 표면적으로 티를 내면 공정거래 같은 걸로 경쟁사에서 문제를 삼을 수 있기 때문에 주로 자사제품에서만 가능한 기능 한두 개를 넣는 걸 제일 선호한다. 문제는 소프트웨어 솔루션의 경우 다른 회사들도 개발할 수도 혹은 개발이 된 걸 모를 수도 있기 때문에 100퍼센트 안심할 수는 없다는 데 있다. 아무튼 RFI를 만들어 주는 것은 영업사원의 가장 큰 영업성과라고 할 수 있다.
3. RFP 작성 및 제안설명회 개최
이제 RFI까지 내부에서 승인이 되면 본격적으로 업체에게 이렇게 제안해 주십시오 라는 제안요청서가 만들어진다. 이걸 보통 RFP, 즉 Request for proposal 단계라고 한다. 이 단계에서는 공식적으로 고객이 업체들을 불러 모아 제안설명회를 개최한다.RFI를 기반으로 RFP를 업체에 전달하고 기한에 맞춰 제안서를 제출할 것을 요구한다.
RFP는 이런 사업을 하겠다, 이런 제품을 도입하겠다는 공식적인 발표이기 때문에 모든 업체는 이 RFP의 기준과 규격에 부합하는 제안을 해야 한다. 이 기준과 규격에 나와있는 조건을 하나라도 맞추지 못하면 제안할 수 없으며 거짓으로 제안을 할 경우 나중에 다른 사업까지 큰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여하튼 RFP를 기준으로 각 회사는 고객에게 제출할 거의 수백 페이지의 제안서 작성에 들어간다.
RFP가 중요한 이유는 공식적인 문서이기 때문이다. 업체 모두가 승복하고 따라야 하는 지침이기 때문이다.RFP에 자사의 장점이 조금이라도 더 표현될 수 있다면 수주가능성이 훨씬 높아지기 때문에 영업사원은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영업사원들 간에는 농담 삼아 '도입되는 제품의 업체명엔 F가 들어가야 한다' 이런 정도로까지 문구를 넣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자주 한다.
4. 제안서 제출 및 제안발표회 개최
영업사원은 사실 제안서작성에 기술적으로 개입하지는 않는다. 대신 고객과의 접점에서 얻어낸 각종 유리할 수 있는 포인트를 제안팀에 전달하고 그다음엔 제안서 작성에만 집중할 수 있게 밥과 술을 열심히 제공한다. 나 같은 경우엔 도움이 되라고 밤새고 있는 제안팀 옆에서 기타 치고 노래를 불러줬는데 베짱이냐면서 혼이 많이 났다.
그런데 제안서는 정말 과학이 몇 개 존재한다.
1. 아무리 제안서제출 기한이 촉박하고 써야 할 분량이 많아도 제안서는 늘 기한 내에 제출된다. 다만 촉박하게 작성할 경우 퀄리티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2.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오타는 항상 존재한다. 절대적인 분량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쌩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기존의 비슷한 것을 복붙 하는 내용이 많기 때문에 회사이름 같은 게 수정이 안 되는 경우가 있다. 이게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하면 낭패다.
3. 제안서 제출일은 항상 명절 같은 긴 연휴 바로 다음이다. 그래서 늘 짜증은 폭발한다. 도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4. 제안서를 며칠 동안 밤을 새워 작성하고 인쇄와 제본을 맡긴 뒤 새벽에 먹는 포장마차에서의 소주가 가장 달다.
제안서를 제출하고 이제 고객의 일정에 맞춰 제안하는 모든 업체는 다 같이 모여 제안발표회를 개최한다. 제안발표회는 여러 가지 중요한 요소가 많고 에피소드도 많아 따로 얘기하려고 한다.
5.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및 수주.
제안발표까지 마치고 나면 이제 결정의 시간이다. 영업사원은 물론 제안서를 작성하고 PT를 했던 사업기획팀까지 초죽음이 되어 기다리는 시간이다.
제안발표를 마치면 심사위원들은 채점표를 모아 전달하고 담당자 혹은 책임자는 가장 높은 점수를 얻은 업체를 통보한다. 케네디가의 가훈이라고 했던가?1등을 해야 한다. 2등 이하는 패배이기 때문이다.다만 여기서 자주 일어나지는 않지만 변수가 있다면 1위 업체가 발표되고 진행되다가 무슨 문제가 생기면 2위 업체에게 수주의 기회가 돌아가기도 한다. 그래서 제안발표회가 끝나고1위를 발표할 때 수주업체라고 하지 않고 우선협상대상자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보통 영업사원들은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는 순간 기쁨의 샴페인을 터뜨린다.
내가 임의로 구분한 초기 다섯 단계의 영업프로세스를 살펴봤다. 아마 공공영업 혹은 규모가 큰 영업을 하는 영업사원들은 몸으로 체득하는 절차이겠지만 글로 정리하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단계마다의 영업사원의 롤과 임무는 한번 정도 되새길 필요가 있다.가장 중요한 제안발표회에서의 영업사원의 역할은 다음 편에서 자세히 그리고 재밌게 알려주기로 하고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영업을 하지 않는 일반인들은 생소할 수도 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가전제품을 하나 사도, 인터넷쇼핑을 하나 주문해도 축약의 형태로 위의 단계를 거친다는 걸 느낄 것이다. 영업은 하나의 제안으로, 혹은 하나의 제품으로 매슬로우의 욕구를 순서 없이 채워줘야 하는 작업이기에 어쩌면 힘든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결론. 순서대로 욕구충족이 일어난다는 매슬로의 욕구 5단계설은 영업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수주 후에 발생하는 영업프로세스는 2탄에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사족 : 아들놈의 정치
정치라는 것이 무언가를 교환하면서 서로의 이익을 취하는 행위라면,
영업은 단언코 고도의 정치 행위일 것이다.
문제는,
대부분의 구매자는 '니들 아니어도 살 곳은 널렸어'라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는 건데,
요즘 말로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것이다.
그 기울기를 원점 근접하게 돌릴 기회의 시작이 제안서다!!
적어도 제안서만큼은 갑을관계가 없이 '우리 제품 안 사면 당신들이 손해'라는 어필이 가능하니까.
제안서를 만들 때 그냥 선배 제안서 대충 복붙 하면 절대 안 되는 이유가 이것이다.
우선,
제안서를 통해서 갑을관계, 심하게는 주종관계가 아닌 윈윈 하는 파트너 관계를 어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얻어지는 영업자의 자부심은 영업 프로세스 내내 큰 힘이 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안다.
무슨 마법을 부려도 영업자의 마지막 멘트는
"잘 부탁드려요" 라거나
"도와주세요 ㅠㅠ" 일 가능성 99%
"방을 치우면 만원을 주마"
"돈은 됐고, 저번에 마트에서 본 레고 자동차 사 줘"
등줄기가 서늘해진다.
'그건 8만 원인데...'
머리 굴려봐야 승산이 없다. 잘해 봐야 '다음 달 월급 타면'으로 시간을 버는 정도?
영업제안서 마지막 장에 '아들놈의 귀여움' 같은 도표 하나 넣을 수 있다면 인생 참 여유로울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