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결같은 사람이란
종종 친구들이 하는, 고등학생 때나 새내기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에 나는 별로 동의할 수 없다. 물론 떠올려 보면 좋은 시절이었고, 아름다운 순간들이 많았다. 하지만 내가 그때의 나에서 지금의 나로 변화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과 자기혐오, 반성과 후회를 거쳐왔는데, 그걸 다시 겪고 싶지는 않다. 그 변화의 구체적인 내용이나 득점, 실점의 내역은 따져봐야 하겠지만, 그것들을 합쳤을 때 나는 분명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했다고 믿는다.
물론 그런 사람은 없겠지만, 정말 예전과 하나도 변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가능하다면 과거로 돌아가는 게 이득일 것이다. 그저 생이 좀 더 길어질 테니까.
나는 언제나 여지를 남겨두는 사람이 좋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여지, 내가 모르는 것이 존재한다는 인정, 새로운 사실과 깨달음으로 내 가치와 생각이 변할 수 있다는 유연성. 이런 수정가능성이 없는 사람은 게임의 NPC(Non-playable character)와 같다. 언제 말을 걸어도 항상 같은 대답을 내놓는, 같은 자리에 변함없이 서있는 NPC 말이다. 처음 RPG 게임을 하면 NPC 역시 하나의 친근한 인물처럼 느껴지지만, 계속 플레이를 하다 보면 NPC는 게임 진행과 시스템을 위한 인간 형태의 장치임을 깨닫게 된다. 의미있는 상호작용을 할 수 없고, 내가 생각하고 원하는 것을 전달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여러 종류의 사람을 만나다 보면, 현실에도 이런 사람이 존재한다는 걸 깨닫게 된다. 무슨 말을 해도 가서 닿지를 않고, 대화를 하다 보면 맥락이 희미해지는, 그의 세계에 내가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는 사람.
여기서 말하는 여지란 상대주의와는 다른 것이다. 네 말도 맞고 내 말도 맞으며, 거기에는 전부 동등한 가치가 있다고 말해서는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니, 상대주의는 본질적으로는 수정가능성을 부정한다. 어차피 모든 의견이 옳으며 존중받아야 한다면 내가 왜 의견을 바꿔야 하겠는가? 우리는 판단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각자가 가진 정보를 종합해 최선의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나는 무엇이 옳다고 믿어서 이를 주장하지만, 새로운, 혹은 내가 간과한 정보에 기반한 더 합리적인 대안이 제시된다면 언제든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수정가능성이다.
하지만 지금껏 한 이야기와는 대조되게, ‘넌 한결같아서 좋아’ 라는 말은 참 예쁜 칭찬으로 들린다.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 사람을 좋아하는 걸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그런 사람들은 삶에서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확고해서, 저 멀리를 바라볼 수 있어서 한결같은 사람일 것이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오히려 눈앞의 일에 유연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 멀리 보이는 저 푸른 동산에 가는 길은 쭉 뻗은 곧은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간에 돌덩이가 있으면 우회해야 하고, 길을 잘못 들었으면 뒤로 돌아가야 한다. 계속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세계를 관찰하고 이해해야 한다. 한결같기 위해서는 백조의 물밑 발길질처럼 끊임없이 노력하고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정말로 변화하지 않는 사람은 길을 잘못 들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뉴스의 정치란에서 꽤나 자주 접하게 된다. 그들은 오래된 내비게이션을 업데이트하지 않았거나, 핸들이 고장나 있는 차와 같다. 우리는 그들을 한심하게 바라보지만, 그런 사람들도 한때는 가장 명석한 직관과 유창한 언변을 가졌던 이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남들을 비웃으며 내가 세상 모든 걸 다 파악했다는 태도나, 뒤가 없이 악에 받쳐 싸우는 배수진의 각오는 많은 경우 자신에게 그렇게 좋지 않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스스로의 퇴로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과거를 돌아보면 늘 부끄러운 순간들이 있다. 그것과 조금이라도 더 멀어지고 싶어서 이렇게 변화에 집착하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