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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eon May 22. 2020

불가피하게 과거와 현재를 사랑하기

과학사와 인생의 평행이론

    한 친구는 자신의 옛날 모습이 너무나 부끄러워서, 그 때를 떠올리고 싶지 않고 그 기록들을 모두 지우고 싶다고 했다. 놀라운 이야기는 아니다. 누구나 부끄러운 과거가 있고, 옛날이면 모두가 잊어 흔적조차 남지 않았을 것들도, 요즘은 SNS나 메신저에 ‘박제’되어 이제는 잊혀질 권리를 주장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많은 친구들이 페이스북 계정을 새로 만들고, 오래된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들을 일일이 넘겨서 삭제한다. 하지만 나는 반대로, 웬만한 기록들은 삭제하지 않고 남겨두는 편이다. 나는 과거의 좋은 날들 뿐만 아니라, 부끄럽거나 아팠던 날들도 완전히 잊어버리기보다는 보존하고 싶어한다.


    과거를 돌아볼 때, 어떤 시절에 그 때의 최선을 다해서 살았는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나는 그 과거가 부끄럽더라도 그것을 사랑할 수 있다. 물론 이 때의 ‘최선’은 내 좁은 시야와 얕은 경험 내에서 나온 것이니 꽤나 개인적인 것이고, 늘 부족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나은 선택을 했던 과거를 미워한다면, 나는 나의 현재 역시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언제나 지금의 선택이 미래에 잘못된 것으로 밝혀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고, 그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사람이 온전히 살기 위해서는 현재의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니 나는 지금의 나를 사랑하기 위해, 그 시절에 최선을 다했다면, 나의 과거 역시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인생의 과정이 과학의 발전 과정과 비슷하다는 건 참 흥미롭다. 현재의 과학 이론은 언제든 틀린 것으로 밝혀질 수 있지만, 더 나은 대안이 없는 한 과학자들은 그 패러다임을 사랑하는(믿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는 어떤 연구도 해나갈 수 없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언제나 의심하고 ‘더 나은’ 것을 탐색하는 일 역시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런 과정을 거쳐 물리학의 계보는 뉴턴의 고전역학으로부터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으로 이어졌다. 이제 우리는 뉴턴의 역학이 실제 세계에 대한 근사에 불과함을 알고 있지만, 그것은 과학의 부끄러운 과거가 아니며, 여전히 우리의 세계를 설명하는 데 매우 유용한 이론이다. 그리고 뉴턴의 역학이 없었다면 양자역학도 없었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계속해서 변화와 성장을 좇는다. 새로운 가치를 찾으면서 한때 갈구했던 인정과 가치가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원하는 사랑의 형태가 달라지기도 한다. 과거가 조금 부끄러워졌다는 건 우리가 조금 더 나아졌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거의 내가 있었기에 현재의 내가 있다.


    어릴 때 읽던 과학책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늘 과거의 잘못된 이론을 주장한 사람으로 등장해서, 한심하고 고리타분한 옛날 사람으로 비치기 쉽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 과학사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2천 년 전의 철학자가 온갖 분야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그가 철학과 과학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왜 그가 만학(萬學)의 아버지라 불리는지 알 수 있다. 물질이 불에 탈 때 플로지스톤이라는 보이지 않는 원소가 관여한다는 18세기의 주장은 지금 보면 너무나 비과학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나름대로 상당히 많은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이론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과거의 이론 체계에서 얻어진 여러 관측과 통찰들은 많은 경우 새로운 패러다임에서도 의미가 있다.



    그러니 과학사를 돌아볼 때 인류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천동설을, 플로지스톤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천동설을 고집하여 갈릴레이를 심문하고 브루노를 화형시킨 교회를 부끄러워해야 한다. 아직도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들이나, 코로나 전파를 막는다고 5G 기지국에 불을 지르는 사람들의 존재를 부끄러워해야 한다. 충분히 생각하지 않았던 과거는 부끄러운 것이니, 우리는 늘 치열히 사유해야 한다. 원한다 믿었던 것을 가졌어도 행복하지 않을 때, 나의 진심이 다른 이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때, 최선이라고 믿었던 선택이 잘못된 결과를 가져올 때, 우리는 아예 생각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생각하고 고민한 사람만이 그럴 수 있고, 그 때 과학의 패러다임이 바뀌듯 우리의 사고와 세계관이 확장될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든 최선을, 진심을 다할 때 거기에는 어떤 아름다움이 있다. 뒤틀린 한국의 교육 제도를 뜯어고치고 싶어도, 새벽에 집을 나서는 고등학생들의 풍경에는 어떤 숭고함이 있다. 떠올리면 이불을 걷어차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첫사랑에도, 나의 진심이 있었다. 그런 시절을 너무 그리워하지도, 또 굳이 지우려 하지도 않을 때 현재의 자신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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