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2단상_20250502

시작과 끝의 사이

by 여섯

시작과 끝이라고 적고 그 사이에 몇 개의 단어를 생각해 본다. 삶, 여행, 계절, 우주, 생각, 죽음, 사랑, 일, 질병, 시간... 어떤 걸 갖다 놓느냐에 따라 다가오는 느낌은 사뭇 다르지만 개별 인간의 시작과 끝에 가장 관심이 간다. 누군가 호모사피엔스의 가장 큰 특징이 다른 사피엔스에 관심을 가진 점이라고 했듯이.


매주 금요일 발행되는 한겨레의 주말판 부록에 권정생의 이야기가 실렸다. 지난 3월 거대한 산불이 안동을 지나갔을 때 그의 생가는 화마를 비껴갔으나 집 뒤 언덕은 까맣게 탔다 한다. 그래도 한 달이 지난 지금, ‘빌뱅이 언덕’에는 까만 잿더미를 뚫고 새싹들이 나오고 있다. 생명이란 것은 신비하고, 질기고, 때론 위대하다.


어려서 걸린 결핵으로 평생 고생한 권정생 할아버지는 1968년이니까 서른 한 살때부터 안동의 조탑마을 일직교회에서 종지기로 일하면서 동화를 썼다. 평생 혼자 살았고, 적게 먹고, 낮은 곳에 있는 자(것)들을 가여히 여기면서 예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국민학교가 배운 것의 전부였고 종지기 전에는 고구마 장수, 나무 장수로 살았다는데 가장 어울리지 않을 것같은 신앙과 유물론의 결합(신앙이란 실천이다, 실천이 없는 신앙은 자기위안 아니면 기복일 뿐이다)을 말과 몸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동화 쓰는 형님이 생전에 오두막으로 찾아갔을 때, 인기척에 낮잠에서 깬 선생은 배가 고프다면서 대접에 담긴 밥인지 죽인지를 뒤덮은 곰팡이를 숟가락으로 걷어내고는 자셨다고 한다. 식도락이나 미식이라는 말은 아예 모르고 사셨을 것같다. 먹고 사는 것을 생존의 필요조건이라 생각들 하는데, 더 줄여서 사는 것 만으로 사는 이들도 있다.


2014년 11월부터 8000일의 여행을 하고 있는 친구의 블로그에 오늘 날짜로 4171이 남았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오토바이에 의지해서 3829박을 1인용 텐트에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면서 지내온 친구의 10여년, 그 시작과 끝은 어떤 모습일 지 궁금해지는 저녁이다.


* 거친물결구름(Asperitas)_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