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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불씨, 큰 용서

용서는 걱정과 불안을 잠재운다.

by 유화

어린 시절 나는 동생에게 그리 좋은 오빠는 아니었다. 자주 동생을 놀려먹고 약 올리는 오빠였으니 말이다. 우리가 가위바위보를 하는 것을 엄마에게 걸리기 전까지만 해도 내 승률은 100%였다. 가위와 바위가 만나면 당연히 바위가 이기는 것이지만 나는 가위를 내고도 이겼다.


"이 가위는 강철 가위라서 바위도 자를 수 있어. 그래서 내가 이긴 거야~!"

TV채널 선택권과 같은 상당한 이권을 두고 벌어진 이러한 부정은, 목격하신 엄마로 하여금 그동안 가위바위보 승자라는 이름으로 내가 싹 쓸어갔던 무수한 혜택이 과연 공정했는가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엄마는 동생에게 가위바위보의 룰은 유창한 말과 설명에 달린 것이 아니라며 오빠가 또 이상한 소리를 하면 엄마에게 말하라고 당부하셨다. 여기까지는 내가 동생에게 좋은 오빠가 아니었다는 것을 설명하던 것이었고 이제는 할머니 댁 이야기를 해보겠다.


할머니 댁에서 지내면서 재밌고 신기했던 것 중에 하나는 바로 쓰레기 태우는 것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시골이어서 그런지 할머니께서는 쓰레기가 모이면 마당에 불을 피워놓고 쓰레기를 태우셨다. 그때가 되면 나는 밖으로 나가서 불구경을 하면서 할머니 몰래 나뭇잎이나 지푸라기를 주워서 불속에 넣기도 했다. 몰래 했던 이유는 불을 바라보는 것까지는 허락해 주셨지만 무언가를 집어넣는 것은 '불장난을 하면 밤에 오줌 싼다'라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우리 남매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신 안방에서 함께 잤는데, 안방은 가로로 넓은 직사각형이었다. 거실에서 안방으로 통하는 문은 낡은 미서기 문이었다. 문에서 바라볼 때 우측 벽면 전체는 옷장이었고, 정면에는 TV가 있었다. TV 좌측으로는 코너에 이불과 요를 잘 개서 쌓아 두었지만, 할머니 또는 할아버지께서 쉬실 때는 좌측 벽에 바싹 붙여서 요를 깔아 두기도 했다. 안방에서 거실로 나오면 좌측에 고모의 방이 있었는데, 그곳에 비로소 오늘의 이야기의 핵심! 우리가 매일같이 뛰어노는 침대가 있었다.


안방에서는 할머니께서 주무시고 계셨고, 나도 할머니 옆에 한가롭게 누워 TV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고모 방에서 동생이 우는소리가 들렸다. 마침 TV도 재미없었던 차에 동생은 무슨 일로 우는가 싶어 거실로 나왔다. 거실로 나와 보니 동생이 서럽게 흐느끼는 소리가 제법 컸기에 할머니께서 단잠을 주무시는데 방해가 되겠다 싶어 미서기 문을 닫아드렸다.


"뭐야~! 여기서 왜 울고 있어?"

"아니 그게, 흑흑 목걸이 만들어야 하는데 다야몬드 흑흑 침대 밑에..."


무슨 일인지 이야기를 들어보니 동생이 구슬꿰기 놀이를 하면서 목걸이를 만들고 있는데 가운데를 장식하고 싶었던 다이아몬드(마름모) 모양의 구슬이 침대 밑으로 굴러들어가서 찾을 수 없어서 우는 것이었다. TV에서 재밌는 만화영화라도 했다면 거기에 빠져서 울음소리도 듣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료했던 나는 서럽게 흐느끼는 동생의 소리를 들었고, 그 사연은 내 마음을 움직였다. 나는 그리 길진 않았지만 내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오빠로서 정말 동생에게 해주지 못한 것이 너무도 많았다. 개구리 왕눈이 노래 좀 그만 부르라고 얼마나 구박을 했던가. 그동안 잘 챙겨주지도 못했는데 침대 밑으로 들어가 버린 구슬 하나 찾아주지 못하는 것은 오빠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걱정하지 마, 오빠가 꺼내줄게 그만 울어"

멋지게 말을 하고 프레임 아래로 너풀거리는 침대 커버를 들어 올렸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침대 밑에 고개를 처박았는데 너무 깜깜해서 아무리 눈을 껌뻑거려도 구슬은 보이지 않았다. 일단 후퇴!


"오빠 찾았어?"

"아니 이제 막 봤는데 뭘 어떻게 찾아~! 조금 기다려봐!"

나는 확신에 찬 발걸음으로 현관으로 향했고, 그곳에는 할머니가 쓰레기를 모아서 태울 때 쓰시던 라이터가 있었다. 처음 잡아본 라이터는 칙칙 소리만 날뿐 불이 켜지지 않았다. 한 손으로 라이터를 쥐고 계시던 할머니의 모습을 기억하며 다시 한번 힘껏 라이터를 돌렸다. 드디어 불이 켜졌다. 그러나 기쁜 마음에 엄지손가락을 떼는 순간 불은 꺼지고 말았다. '아 불이 켜져도 손가락을 떼면 불이 꺼지는구나!' 고모 방으로 돌아오면서 시험 삼아 한 두 번 더 켜봤는데 라이터를 한 손으로 잡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나와봐, 이제 꺼내줄 테니까!"

나는 자신 있게 바닥에 엎드려서 침대 밑으로 고개를 처박았다. 그리고 라이터를 켰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구슬은 내 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전쟁에서 이기고 엄청난 전리품과 함께 돌아오는 장수처럼 어깨를 활짝 펴고 일어나 동생에게 구슬을 내밀었다.


"오! 다야몬드 구슬이잖아! 오빠 정말 최고야!"

별것도 아닌 것인데 이리도 좋아하는 것을 보며 평소에 좀 잘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약간의 찔림이 있었지만 애써 무시하며 돌아서 나가려는 그때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야 말았다. 바닥에 엎드려서 침대 커버를 들어 올리는 순간 아까만 해도 깜깜했던 곳은 빨간 불이 곰실곰실 매트리스를 태우며 크기를 키워가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서 일어나 동생을 보았다. 불이 난 줄도 모르고 목걸이를 완성할 생각에 즐거워하는 동생을 향해 나는 달려가서 목걸이를 빼앗아 방 한쪽 구석으로 던져버렸다. 놀라서 말을 잇지 못하는 동생에게 나는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시뻘겋게 변해가는 매트리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야 불났어! 정신 차려! 우리 이거 빨리 꺼야 돼!"

마치 전쟁영화에서 보면 패닉에 빠진 후임병을 다그치는 선임병처럼 구슬꿰기 따위 놀이가 아닌 생존을 위한 절대적인 임무를 하달했고 우리는 곧장 행동으로 옮겼다. 화장실로 달려간 동생은 양치컵에 물을 받았고 나는 바가지를 양손에 쥐고 물을 퍼 날랐다.


"무슨 소란이여!"

고모 방과 화장실을 오가는 소란스러움에 할머니께서는 잠에서 깨어 드르륵 미서기 문을 열고 소리치셨다.


다다다다! 도도도도! 촤작! 촥! 쵹! 다다다다! 도도도도!

다다다다! 도도도도! 촤작! 촥! 쵹! 다다다다! 도도도도!


할머니께서 마주하신 모습은 내가 양손에 바가지를 들고 달리면 동생이 양치컵을 들고 뒤따르는 모습이었다. 나는 할머니께서 아셨다는 사실에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이대로 멈출 수 없었다. 할머니를 무시하고 물을 퍼 나르기를 계속했다. 한참을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내 눈앞에는 작은 대야를 들고 달리는 할머니가 계셨다.


내 잘못을 알고, 벌을 받을 것도 알지만 예상하는 것과 선고를 받는 것은 차이가 있다. 이미 할머니께서 불이 난 것을 아셨지만 우리 힘으로 수습하고 벌을 받는 것과 할머니도 함께 수습하게 만드는 것은 엄연히 차이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갑자기 달리던 다리가 풀렸고 주저앉은 나는 무릎을 꿇고 손을 들었다.


"할머니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아니 뭐 하는 거야! 불이나 꺼!"

나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여전히 양치컵을 들고 달리고 있는 동생의 손을 붙잡아서 내 옆에 같이 무릎을 꿇렸다.


"할머니 제발! 용서해 주시기 전에는 일어날 수 없어요!"

"알겠으니까 일단 빨리 불부터 꺼!"

할머니께서 알겠다고 말씀하심과 동시에 나는 용수철이 튀어나가듯 달려 나갔다. 그렇게 우리는 불을 껐다. 천만다행으로 불은 침대와 그 위에 있는 이불만 태웠을 뿐 벽으로 옮겨 붙지 않고 꺼졌다. 다만 불똥이 떨어지며 눌어붙고 구멍 뚫린 장판과 바닥에 흥건한 물 그리고 온 집안에 진동하는 타는 냄새는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여실히 말해주고 있었다. 할머니께서는 동생과 나 모두 안방에 들어가 있으라고 하셨다. 방으로 들어가면서 본 할머니의 모습은 바닥에 흥건한 물을 걸레로 닦고 그것을 대야에 짜는 것의 반복이었다.


방으로 들어간 우리는 TV를 켜는 것도 아니고 그저 가만히 앉아있었다. 정리를 다 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할아버지와 고모도 집에 오셔서 불탄 침대를 보셨다. 침대 프레임과 용수철만 남은 매트리스는 집 밖 담벼락에 세워두었다.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우리에게 이게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는지 주의를 주셨을 뿐, 크게 혼을 내고 야단을 치지는 않으셨다.


어느덧 개학이 다가왔고 할머니 댁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 되었다. 그러기 위해 엄마와 아빠도 할머니 댁으로 오셨다. 엄마, 아빠에게 인사를 드리고 나는 안방에 들어가서 TV를 봤다. 눈은 TV를 보고 있었지만 혹시나 할머니께서 무슨 말씀을 하실까 싶은 마음에 귀는 거실에 계신 할머니와 엄마, 아빠를 향해 있었다.


"어머니, 그런데 침대를 바깥에 내놓으셨네요?!"

"그냥 좀 버리려고 내놨어."

할머니께서는 그냥 내놨다는 말씀 외에는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아, 됐다. 아, 이제 살았다.' 침대에 불을 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내 마음을 짓누르던 모든 걱정과 불안으로 이루어진 응어리가 그 말씀을 듣지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나왔다. 나는 울음을 애써 삼키며 말했다.


"와... 테레비 보는 거 정말 재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자동차에서 엄마는 할머니께서 우리가 많이 놀랐고, 우리에게 충분히 주의를 주셨으니 엄마, 아빠는 혼내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했다. 그 말은 나에게 진정한 의미의 평안함을 가져다주었다. 만일 할머니께서 정말 부모님께 말씀하지 않고 비밀로 하셨다면 나는 앞으로 할머니 댁에 방문할 때마다 내 잘못을 마주하며 언젠가 들킬지 모르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부모님께서도 모든 것을 알면서 나를 용서해 주셨다. 이제야 진정한 용서를 받은 것이었다.


집에 도착해서 나를 앉혀두고 마주 보며 이야기하지 않으신 엄마의 배려가 참 좋았다. 마주 앉아서 듣는 이야기는 마음이 불편하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그 불편함은 마주 앉는 것만으로 나는 피고인이 되고, 엄마는 나를 기소하는 검사가 되며, 할머니는 소를 취하하신 원고가 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 속에서 어린 나는 할머니의 용서는 느껴도 엄마의 용서를 느끼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자동차에서 앞을 바라보시면서 덤덤히 하시던 말씀은 그 어느 때보다도 뒤에 앉은 내 귀에 잘 들렸다. 우리는 모두 한 방향을 바라보고 앉았고, 창밖으로 휙휙 지나가는 풍경은 바뀔지언정 우리는 바뀌지 않았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어린 시절 받은 가장 기억에 남는 용서는 무엇이었나요?

그 경험은 지금 당신의 용서 방식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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