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 PD 입봉일기 #14
링크드인에 업로드 중인 예능 피디 입봉일기를 브런치에도 옮겨볼까 합니다.
대단한 성과가 나서 올리는 입봉일기면 좋겠지만 아직 과정 중에 있어요.
뿌듯한 감정 49, 두려운 감정 51 로 분투하는 햇병아리 리더의 생각 흐름을 보고
공감하거나 위로받을 팀장님들, 대표님들, 그리고 직장인 분들이 브런치에도 많을 것 같아서요.
*** 사진은 AI 로 작업합니다.
마지막 촬영이 끝났습니다. 시골마을에 사흘간 머물며 정들기를 세 번 반복했어요. 촉촉하게 비 내리는 바닷마을, 따뜻한 햇볕 내리쬐는 농촌마을, 새벽 물안개 피어오르는 강변마을을 돌고 나니 서울엔 초가을을 알리는 비가 오네요.
참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첫 번째 촬영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선발대로 내려가기 전날, 제목과 구성이 바뀌었거든요. 숙소에 모여 새벽까지 회의한 순간은 아마 오랫동안 잊을 수 없을 거예요. 극 계획형 인간이라 정리를 끝마쳐야 마음 놓고 잠드는 편인데. 처음으로 현장을 믿기로 결심한 다음, 좀처럼 오지 않는 잠을 청했습니다. 의견이 부딪치는 건 좋은 일이다, 건강한 일이다, 모두들 전문가니까 내던져져도 뭐든 되겠지, 그렇게 불안감을 실체 없는 믿음으로 꽁꽁 싸매며 시작한 촬영이라, 진행 상황을 지켜보며 실시간으로 구성을 만들던 뜨거운 스탭룸 공기가 아직도 생생하네요.
두 번째 촬영은 출연자를 최대한 즐겁게 하자는 마인드로 접근했습니다. 첫 촬영이 힘들었다는 피드백도 있었고, 출연자가 즐거워야 보는 화면도 즐거울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끊어야 할 때와 붙여야 할 지점을 컨트롤해 가며 최대한 편안한 환경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막상 편집을 들어가 보니 고난과 역경(?)이 없어서인지 너무 잔잔해서 조금 아쉽지만, 촬영장에 있는 사람들 사이엔 점점 신뢰가 쌓이는 것이 느껴졌던 촬영으로 기억됩니다.
두 번째 촬영 후엔 든든한 선배 한 분이 찾아와 조언을 주셨어요. 출연자에게 약간은 힘든 상황을 만들어 줘야 재미있는 상황도 생긴다고요. 맞는 말이었습니다. 일상 같은 상황 속에 다이나믹을 주는 것이 제작진 일이니까요. 리얼리티라고 너무 풀어놨나 싶어서, 세 번째 촬영 때는 쫀쫀한 구성을 투입, 출연자를 조금 힘들게 하기로 했습니다. 답사도 한번 더 갔고, 마을 구석구석에서 일거리를 찾아내어 출연자에게 안겨 주었더니 투덜대는 와중에 재밌는 일이 계속 발생하더라고요. 덕분에 (드디어) 머릿속으로 편집할 그림을 착착 붙이면서 촬영할 수 있었습니다.
세 번의 촬영동안 모두 다른 스탠스를 취했으니, 결을 맞추기 위해 우리 프로그램의 한 줄, 달려가는 목표만큼은 허물어지지 않도록 추가 요소를 많이 생각해야 했어요. 에필로그 인터뷰 중, 시청자들이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감정을 출연자가 그대로 느끼고 말로 빚어주는 걸 들으며 조금 안심했습니다. 출연자가 느꼈다면 그것을 보는 이들에게 전달하긴 쉬우니까요.
가슴을 쓸어내리며 마지막 인터뷰를 마친 후엔 모두 모여 사진을 찍었습니다. 아직 오픈 전이라 제목을 공개하긴 어렵지만, 제목과 관련된 귀여운 시그니처 포즈를 이따만한 감독님들과 출연자 스탭까지 모두 하고 있는 사진을 보니 웃음이 나더라고요. 이렇게 적은 인원으로 말도 안 되는 촬영을 했다는 것이 경이로우면서도, 오히려 사람이 적어서 더 돈독하게 일했나 싶기도 합니다. 막촬 기념으로 간 고깃집에서 (오 고기를 먹었네요) 어느새 서로 친해진 감독님들이 한 잔 하시며 해준 말이 있어요. 촬영장 분위기 좋게 해 줘서 고맙다고. 몰라서 못 하는 사람도 있지만 알고도 안 하는 사람이 있는데, 생각보다 어려운 그걸 해준 덕에 재밌게 잘 촬영했다고. 파일럿 촬영 잘 마쳤으니 200회까지 함께 가자고. 조금 비현실적인 말이었지만 그래도 좋더라고요. 좋은 현장에서 좋은 작품이 나온다고 믿는 사람이니 이걸로 됐다 싶기도 하고요.
가볍게 적었지만, 온통 반성뿐인 촬영 리뷰 메모를 붙들고 암담함을 느낀 시간도 많았습니다. "세 번째 촬영까지도 계속 배우는 과정이어서 어떡해요?" 라는 말에 메인 작가님은 “세 번째 촬영만에 이렇게 배운 게 어디예요” 라고 하시더라고요. 모든 장면을 보고, 인지하고, 예측하고, 컨트롤해야 하는 메인의 롤을 지키자니 버거울 때도 있었지만, 세상 누구보다 열심히 하는 연출팀, 작가팀, 그리고 스탭들 덕에, 즐겁게 찍자, 재밌게 찍자, 자기 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힘들고 부담스러운 건 똑같으니까 힘을 내어 보자, 라며 버틸 수 있었습니다.
지난한 편집과 후반 작업이 남아 있지만, 한 단계를 무사히 마무리했으니 또 갈 수 있겠죠? 방송이 끝날 때쯤엔 좀 더 편안히 웃게 되기를 바라면서 하루를 푹 쉬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