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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은 운동 같아서 - 1회 가편 이야기

예능 PD 입봉일기 #15

by 희제


링크드인의 예능 피디 입봉일기를 브런치에도 옮겨둡니다.

브런치를 읽는 팀장님들, 대표님들, 그리고 직장인 분들이 조금이나마 공감하거나 위로받으면 좋겠습니다.

*** 사진은 AI 로 작업합니다.




편집 이야기는 시작하기가 어렵습니다. 분명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단계인데. 너무 길고 지난한 과정이어서 그런지, 임팩트가 촬영만큼 짧고 굵지 않아서 뭉근히 고통받다 까먹게 되는 것 같아요.


이번 프로그램 편집도 어느새 마지막 회 마스터만 남았습니다. 1회 가편할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두 달이 훌쩍 지나갔네요.


편집은 후반 작업 전까지 보통 두 번의 단계를 거칩니다. 분량을 나눠서 가편 후 시사를 보는 단계(물론 여기엔 수정 시사와 재수정이라는 과정이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가편본을 모아 메인 피디가 수정하며 톤을 맞추는 마스터 단계. 보통 마스터를 담당하는 사람은 가편을 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데, 저희는 워낙 인원이 적은 팀이라 가편을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맨 앞부분을 맡아서 편집하는 것이 방향성 설정 면에서 합리적이라고 판단하기도 했고요. 두세 번째 시즌이면 참고할 만한 그림이라도 있겠지만, 새 프로그램의 첫 회차이므로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처음이라 마스터할 거리가 없으니 시간도 넉넉하겠다, 금방 해낼 줄 알았는데. 그 어느 때보다도 어려운 가편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돌이켜보면 프로그램의 시작 부분을 맡은 적이 많아요. 아예 콘티를 짜서 컨셉추얼한 세계관을 그리기도 하고, 출연자 얼굴을 숨기면서 신비감을 자아내기도, 오프닝 그림에 일러스트를 버무려 기획 의도를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했던 편집들 중에 유독 프로그램 오프닝만큼은 별다른 수정사항을 요구받지 않았어서, 확실히 영상에 재미보다 의미를 담는 쪽이구나, 생각해 왔어요. 나름 자신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번 오프닝은 왜 이렇게 어려웠을까요. 프로그램 주제를 알리면서 인물도 소개하는 것이, 어느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인지, 어떤 재미있는 일이 펼쳐질 것인지에 대한 설명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이렇게 어려운 거였나? 두통이 올 지경이었습니다. 적어도 밤샘은 하지 말고 규칙적으로 잠도 자면서 편집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매번 꾸지만, 잠을 자려면 둘 중 하나여야 해요. 확신이 있거나 포기하거나. 둘 다 아니니 인서트 하나 붙이고 고민하고, 자막 한 줄 쓰고 고민하고, 그러다 아침 새소리 듣는 일이 몇 날 며칠 이어졌습니다.


얼른 완성한 다음 후배들 부분 소스까지 보고 시사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말 같지도 않은 계획이더라고요. 첫 시사와 수정 시사 때 모두, 단 한숨도 못 잔 채 다크서클 휘날리며 시사실에 들어갔습니다.


그래도 선배님들과 작가님들이 피드백 꼼꼼하게 주시고, 방향성 논의를 같이 해주신 덕에 수정 시사가 훨씬 나았으니 다행인 걸까요? 마스터 때 또 잔뜩 고민해야 하겠지만, 어쨌든 우린 대략 이런 그림이다, 가 대략적으로 나온 것 같아 다행스러웠던 1회 가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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