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 PD 입봉일기 #17
링크드인의 예능 피디 입봉일기를 브런치에도 옮겨둡니다.
브런치를 읽는 팀장님들, 대표님들, 그리고 직장인 분들이 조금이나마 공감하거나 위로받으면 좋겠습니다.
*** 사진은 AI 로 작업합니다.
늦가을입니다. 가을이 시작됐다는 메모를 남긴 것이 한 달쯤 전이니 이번 가을은 제법 길었네요. 기록해두지 않으면 번번이 짧게 느껴지는 계절이라, 바쁜 중에도 틈틈이 챙겼습니다. 편집실 근처 공원에서 산책도 하고, 커피를 사면서 야외 좌석에 잠깐씩이나마 앉아 있기도 했어요.
그런데 가을을 챙기느라 미처 막내를 못 챙겼던 모양입니다. 며칠간 왜 이렇게 힘이 없는지 모르겠다길래 개인적인 일이 있나 보다 했는데. 문득 헤아려 보니 촬영 후 꼬박 한 달 동안 휴일이 없었더라고요. 다른 후배들이 일주일에 최소 하루씩은 챙겨 쉰다는 건 알고 있었거든요. 막내도 알아서 잘하고 있을 거라 여긴 것이 문제였습니다. 생각해 보니 한 달 동안 쉼 없이 출근하는 와중에 막내는 항상 옆에 있었어요. 알아서 휴일 챙기라는 말이 무의미하다는 것까지 생각을 못 했다니. 잘한다는 이유로 일거리 더 줘놓고 알아서 쉬라고 말했다니 세상에. 누가 들어도 기함할 만한 행동을 무심히 해버렸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습니다.
뒤늦게나마 부랴부랴 데드라인을 뒤로 빼놓은 다음, 무조건 하루 쉬고 오라 했습니다. 그래봤자 하루인 건 너무 눈물이 나지만, 응급처치일 뿐이라는 걸 뻔히 알지만, 현실과 타협하며 일단은 그렇게 했어요. 프로그램 만드는 사람들의 워라밸에 대한 고민은 지독히도 많이 해 왔는데. 정작 제 프로그램을 하게 되니 제 삶부터 사라지는 마당이라 일상에 대한 생각을 잊고 지냈다는 사실이 조금 무섭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편집실에 혼자 있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네요. 안깥양반에게 집에 가고 싶다는 카톡을 보내며 또 수면실에 갈 준비를 하는 새벽 다섯 시.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 같지만 시스템을 고칠 방법은 아직 묘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