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상기록

새해의 낮잠

220101 토요일 - 찬란한 서른다섯을 시작한 날의 기록

by 희제


나는 짝수가 좋다. 2로 나누었을 때 딱 떨어지는 그 은근한 안정감이 좋다. 중요한 일은 오전 11시보다는 오전 10시에 시작하고 싶고, 생일이 7월 17일인 사람보다는 10월 30일인 사람에게 더 정감이 간다. 9일에 떠나는 비행기보다 조금 비싸도 굳이 10일에 떠나는 비행기를 예약할 정도여서, 너무 강박 같다는 인상 때문에 주위 사람들에게 잘 말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를 굳이 적은 건, 짝수 러버인 내게 딱 한 가지 예외가 있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다. 다름아닌 서른다섯 살. 삼십대의 정중앙에 있는 서른다섯 살 말이다.


찬란할 서른다섯


예전부터 그랬다. 서른다섯이 되면 뭔가 근사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왜 그런 생각 있지 않나. 삼십대가 되면 집도 있고 차도 있는, 무척 안정적으로 독립한 한 명의 멋진 어른일 것 같다는 막연한 꿈 말이다. 나도 이런 생각을 처음 한 것이 스물다섯 언저리였으니,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희뿌연 미래를 쳐다보며, 희망을 갖고 싶은 마음에 임의의 나이를 선정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생각은 해가 거듭될 수록 선명해져만 갔다. 서른다섯 살의 나는 엄청 멋질걸, 이라는 문장은 꿈을 먹고 뭉게뭉게 커져서, 그때엔 찬란하게 빛나는 어떠한 이벤트가 마법처럼 나타날 거라는 확신이 되었다.


현실은 낮잠


드디어 맞이한 서른다섯 정월 초하루. 나는 낮잠을 잤다. 이젠 뼈가 시릴 나이가 되었으니 히트텍을 사야 한다며 유니클로에 들른 서른다섯은, 가득한 인파 속에서 옷 두 벌을 간신히 건진 후 총알같이 집에 돌아왔다. 침대도 아닌 소파에 몸을 던진 뒤 해질녘까지 잔 낮잠. 깨어있는 시간을 무척 아까워하는 편이라 주말에도 커피를 부여잡고 버티던 사람이었는데. 서른다섯이 되자마자 까무룩 잠에 빠져버렸다.


20210411_235522.jpg 한창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밤


땅거미가 깊이 내려앉을 무렵. 엉금엉금 일어나 저녁을 준비하며 생각했다. 낮잠을 자니까 개운하잖아? 아니 낮잠이 이렇게 좋은 거였어?


낮잠은 좋은 거였다.


문득 대학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2학년 쯤이었던가. 친구들을 깨우기 위해 기숙사 방 문을 열었던 어느 여름. 각자의 침대에 누워 새근새근 자고 있던 둘의 모습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슬며시 문을 닫고 나왔더랬다. 그 둘이 누구였는지는 가물가물하지만, 그래도 그 순간이 아련히 기억나는 건 그 낮잠이 참 평온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경험이 있는데도 나는 왜 그랬을까. 왜 낮잠을 해악인 양 금기시하며 바닥난 체력으로 아득바득 버텨온 걸까. 무엇 때문에 퇴근 후에도 새벽까지 책상에 앉아 눈을 부릅뜨며, 나는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내지 못했다며 스스로를 채찍질했을까. 어떤 책에서는 낮잠을 통해 하루를 둘로 나눔으로써 아침을 두 번 만들 것을 권하기도 했다. 짤막한 낮잠은 하루의 허리를 자르는 게으름이 아니라 하루를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하는 시간이라면서.


휴식도 결국 일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달은 밤. 나는 더이상 스스로를 몰아세우지 않기로 했다. 사람인지라 곧바로 바뀌기는 어렵겠지만, 더 멀리 가기 위한 여유니까 아주 천천히 손에 쥐어봐도 괜찮지 않을까.


찬란한 서른다섯


서른다섯의 1월 1일은 더 이상 평범할 수 없을 만큼 평범했다. 하지만 그래서 찬란했다. 마음에 넉넉한 여유가 찾아오는 것만큼 빛나는 일은 없을테니까. 여유를 꾸준히 이어 가라고, 더 넉넉해져서 더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라고, 낮잠은 서른다섯의 내게 찾아왔던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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