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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제 Nov 04. 2022

종이로 만든 집에도 기둥은 있어야

종이의 집 스페인 & 한국


400억이나 들여 만든 대단한 드라마라고 했다. 역시 뉴스의 호들갑은 믿는 게 아닌데. 전종서의 내레이션 때문에 처음 10분 동안은 집중하기 어려웠다는 친구의 말뜻을 단박에 알 것 같았다. 한국 작품은 유독 인트로와 아웃트로에 약하다는 말에도 충분히 동의할 수 있었고. 안타깝지만 이 부분은 특색이라 할 수 없다. 오히려 확실히 고쳐야 할 부분에 가까우니까. 작품 선택이든 구간 선택이든, 온전히 소비자의 자발성에 기댈 수밖에 없는 곳이 바로 OTT 생태계 아닌가. 그들을 붙잡기 위해서는 첫인상을 강렬하게 만들어야 한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나 스펙터클한 영상이어야만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적어도 앞으로 이 작품이 어떤 분위기로 흘러갈지 정도는 보여주어야 붙잡힐 만한 취향의 사람들을 붙잡을 수 있다는 거다. 몇 분만에 시청자가 이탈했는지까지 세세하게 카운트하는 시대인데. 대체 왜 넷플릭스가 이런 실수를 한 걸까.



멋진 배우들 잘 모아놓고 대체 왜 ㅜㅜㅜㅜ



비단 인트로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공개된 회차를 전부 봤는데도 허전한 느낌은 여전했으니까. 무슨 내용을 본 것인지 모르겠다는 점이 가장 문제였다. 내가 원작을 보지 않아서 이해가 어려운 건가? 한가닥 희망 아닌 희망을 갖고 스페인 버전을 봤지만 세상에. 슬프게도 원작은 너무나 흥미진진했다.



시시각각 이목을 집중시키는 원조의 매력 



스페인 버전과 한국 버전의 가장 큰 차이는 캐릭터 빌드업이다. 잘 나가다가도 갑자기 튀는 감정선, 이유를 알 수 없는 인물 관계성, 그리고 손발이 오그라들 만큼 과장된 대사. 이상의 것들은 오직 한국 버전에서만 확인할 수 있었다.


도쿄와 리우, 그리고 도쿄와 나이로비는 서로에게 느끼는 특별한 감정이 있다. 한국 버전에서는 기승전결 없이 냅다 주입해버리는 그 감정을, 스페인 버전에서는 시간을 할애해 가며 설명한다. 그 과정이 대단히 긴 것은 아니지만 짧은 시간 안에 높은 밀도로 다루었고, 덕분에 자연스러운 몰입을 즐길 수 있었다.


한국 버전 속 리우와 앤의 키스신도 황당했던 건 마찬가지다. 드라마는 보편적인 감정선을 가진 인간 서사를 다루는 콘텐츠 아닌가. 그런 드라마가 시청자로부터 "갑자기??" 라는 반응을 얻어냈다는 건, 기본을 소홀히 했다는 의미와도 같다. 반면 스페인 편에서는 갑작스러운 키스신 대신 어린 시절에 대한 대화를 잠시 보여줌으로써 둘의 일시적인 교류에 충분한 의미를 부여했다.


덴버 케이스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사람에게 빠지는 데에 반드시 대단한 서사가 있을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시청자들에게 납득할 만한 설명은 해줘야 할 거 아닌가. 현실에서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뜬금포 돌진이라니. 드라마지만 너무 드라마였다.



한국 버전의 표정들만 너무 단편적으로 보이는 건 기분 탓인가



물론 경감과 교수의 관계성이라든지, 남북관계의 대립각이라든지, 잠입 시 안경에 카메라를 심어 두었다는 설정 등은 한국적으로 잘 전환시켰다. 복제가 아닌 리메이크를 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는 점은 잘 알겠으나, 전반적인 스토리가 얼기설기 붕 떠 있는 느낌은 안타깝기만 하다.



원작도 살리고 한국 정서도 살리려다 모든 토끼를 놓쳐버린 비운의 리메이크작






덧붙이자면 스페인 버전의 화룡점정은 첫 시즌의 엔딩이다. 경감이 은신처를 발견하는 장면과 교수 & 베를린이 부르는 저항군 노래의 교차가 감정을 절정으로 떠밀듯 올려주는데 그 느낌이 참 좋았다. 마치 물속에 잠겨있던 감정이 수면으로 부드럽게 올라가는 느낌. 이어지는 돈의 역사 필름으로 적절히 여운까지 남겨준, 시즌 종료의 좋은 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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