씁쓸하지만 더는 씁쓸하지 않을 날의 기록
분명 오늘의 시작은 완벽했다. 말로만 듣던 미라클 모닝을 성공한 아침. 고요한 학교 운동장을 상쾌하게 달렸다. 어떤 이름 모를 선생님과 눈인사까지 나누었으니 제법 프랑스 소설 속 한 장면 같았던 셈이다. 인생이 영화이고 그 영화 속 주인공이 나인 듯한 기분.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자그마한 착각. 몇 달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성취감에 잔뜩 취한 채, 늦가을의 차가운 공기로 더운 김을 뿜어내며 집에 돌아와서는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커피를 한 잔 내려 마신 뒤 발걸음도 가볍게 출근한 회사였다. 어디 한 번 이 회사를 믿어보자며 달리고 있는 요즘. 일련의 사건 이후 최선을 다해 자발적으로 일하는 요즘.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은 모두 마친 뒤 잠시 기다리고 있던 요즘이었다. 준비한 제안이 내부 발표에서 가장 좋은 반응을 얻었으니 이제 성사되기만 하면 되는 타이밍인데. 자꾸만 미뤄지는 외부 미팅이 어딘가 석연찮기만 하다.
회사가 원하는 언어로 정직하게 일했다. 가진 것이 하나도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했다. 잔뼈가 굵어서 온갖 인맥을 동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도움받을 선배들이 많은 것도 아니니까. 그래서 다들 이렇게 열심히 고민하고 있는 줄 알았다. 공동으로 해야 할 일에 불성실한 건 다른 일을 열심히 하고 있기 때문이라 믿어 가면서. 하지만 내가 있는 필드에선 이기심도 재산으로 작용한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정도를 걷는 것 따위 중요하지 않다는 걸, 고연차가 실체 없이 던지는 말장난이 회사에 먹히는 걸 보며 새삼 다시 깨달았다. 이런 게 바로 짬밥의 관록인 건가. 저렇게 말을 하고 당당히 퇴근하면 두 다리 뻗고 잠잘 수 있나.
이 바닥은 다 그렇게 일하잖아요. 피디님도 피디님 것 지키려면 눈 딱 감고 그렇게 해야 해요. 거짓말 좀 하면 어때. 대충 뻥카를 쳐야 사람도 붙고 돈도 붙는다고요. 그렇게 돈 모이면 사이즈 좀 줄여서 가고. 다 그러는 거죠 뭐.
그동안 들었던 가까운 분들의 간곡한 언어들은, 지나가는 말이 아니라 뼈 있는 조언이었다.
오직 말과 사람으로 일하는 업계의 특성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경우가 이러하진 않겠지만, 바닥부터 채워 올리는 공학 필드와는 확실히 다르다. 일단 던져보고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아니면 말았을 때 실망하거나 피해 보는 사람은 내 알 바 아니고. 시켜서 하면 좋고 안되면 더 시키고. 더 시켰을 때 죽어나는 사람은 내 알 바 아니고.
이 일을 너무나 사랑하지만, 이런 관행 아닌 관행에 적응하기는 아직도 쉽지가 않다. 과정이 어떠하든 결과만 가져오면 되는 것이 과연 정답일까. 나는 아직도 너무 이상 속에 사는 걸까. 오직 개인의 목적 달성만 바라보며 채찍을 휘두르는 사람들이 잘 되어갈 때, 착잡해하는 대신 박수 치며 따라갈 배포가 아직 나에겐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