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재인

그날의 약속

by 유인도

조금 늦었는데, 아직 이른가 보다. 재인, 너를 만나는 일이 이렇게나 오래 걸릴 줄은 몰랐다. 아직껏 일방적이며, 고작 한 번의 여름밖에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까지도. 그래서 더 계속할 수밖에 없었던 걸까. 자주 너를 생각하고, 애쓰다가, 조급해지는 나를 재생산했다.

하지만 너와의 약속을 잊지 않으면서 내가 분명하게 알게 된 것도 있다. 네가 약속한 사람은 나이지만, 너는 그것이 나 말고 다른 이에게 전해지길 바랐겠지. 그렇지 않았다면 나와 약속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시퍼래진 손목을 떨면서도 그리기를 멈추지 않는 너였으니. 그 이름을 듣고는 천국을 발견한 것처럼 환하게 웃던 너였으니까. 그날 아름다운 비밀의 서고에서, 네 아름다운 미소를 나는 오롯이 느꼈다. 네가 건넨 약속에 마취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풀리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을 들였다. 그리고 갈수록 생각이 많아진다.

그래, 재인. 내가 아니고는 아무도 네가 누군지 모른다. 너와 그를 아는 유일한 사람인 내가 너를 만나야 할 명목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것 이면의 수많은 상념이 너를 만나야 할 감정적인 근거들을 갱신하는 데 대해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네게 들려줄 말이 하나가 아니다. 우선순위만 나날이 분명해진다.

그러니 약속이란 것이 주는 다층적 혼란을, 재인, 너는 이해하겠지. 아니, ‘다만 재인에게’라고 적어야 하려나? 그라면 그렇게 말했을까. “다만 재인에게, 이것은 네가 한날 한시에 만나자고 약속한 음성 사서함을 찾아가는 탐색의 전술서다.”

심술궂은 줄 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고, 때문에 아직도 종종 가슴 시리다. 그러나 그것이 우선순위를 건드리지는 못한다. 이 혼란을 너와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 유일한 폭약이다.

네가 나타나길 바란다. 지남철의 “감각의 비망록”이 전시된 이곳 부산에, 너는 반드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나는 단 두 마디를 하겠다. 우선순위에 따라, 차분하게 말하겠다. 앞뒤 맥락과 이해관계 따위가 판단에 영향을 주겠지만, 상관없다. 네가 고민할 찰나의 수십만 배의 시간을 내가 생각했다.

그래, 재인. 나는 너를 사랑한다. 지남철이 죽었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