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내 그리웠던

by 유인도

그해 여름은 비가 적었다. 그렇다고 푸르지 못한 것 아니었으니, 부산으로 내려가는 동안 바라본 많은 숲길은 꼭 그곳 그대로 오랫동안 머물 듯했다. 누군가와 함께 가고 싶었지만, 그 누구도 너의 자취를 알지 못했으므로. 그래, 재인. 네가 아니었다면 홀로 멀리 여행하는 일을 감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때 나처럼 외로움이 많은 사람을 버렸으면서도, 그 대상이 나였다면 결코 그것을 용납하지 못했으리라. 나와 달리 고독을 견딜 줄 알았던 걸까. 그는, 아니면 자포자기였을까. 어느 쪽이 더 이롭다고 판단했을까.

지남철은 고독한 사람이었다. 그가 연민이 많아서가 아니다. 웬만한 사람에게는 다 연민이 있고, 그로써 무너져 본다. 하지만 남철에게는 연민이 있다거나 무너진다거나 하는 것보다 조금 더 깊은 고독이 있었다. 나는 눈동자의 기운을 믿었다. 진정으로 고독한 사람의 눈에는 좀처럼 모른 척하고 싶은 갈망이 들어 있다. 잘난 듯 보이기도 하고, 빨려들 것도 같은 무엇이. 그는 상대로 하여금 연장을 들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간 지녀온 나름의 관계 법칙을 단숨에 꺼내 벽이든 문이든 만들게 했다. 실은 그뿐, 넘거나 열고 들어오면 그만인 것을 두고 남철은 괴로워했다.

"왜 사람들은 내게 단계를 만드는 것 같을까."

그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그럼 내비치지 말던가.'

물론 속으로만 생각하던 바다. 그와 함께하는 칠 년 동안 나는 한결같은 사람으로 불렸다. 실제로 그에 비한다면 그랬다. 남철은 예민의 화신이었다. 덕분에 동작이 기민했고 추진력 또한 예사롭지 않았지만, 동시에 회의가 많고 변덕스러웠다. 그에게 고독은 극복하고 싶은 단점이었겠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달랐다. 그것은 그가 공동체를 살아가려면 갖춰야 할 자질이었다. 나는 언젠가 작심하고 그에게 말했다.

"흐느끼는 일을 멈추지 마."

그가 언젠가부터 좀처럼 울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난 뒤의 공격이었는데, 웬걸, 나중에 보니 그는 내 말을 빅터 프랭클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내 의도를 완벽하게 곡해한 것이다.

그래, 재인. 덕분에 나는 끝까지 그에게 좋은 사람이 되었는지 모른다. 나처럼 비밀이 있는 사람에게 그다지도 투철했던 믿음이어서, 너는 그를 사랑했을까. 네가 그를 사랑한 많고 많은 이유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리라는 짐작까지 괴롭다. 단언컨대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고, 여전히 되지 못했다.

작은 모퉁이라도

양희은 & 이적, 꽃병

기찻칸 맞은편에는 대만인 가족이 있었다. 그 중 어머니로 보이는 여자가 번역기를 돌려 내게 말을 걸더니, 이윽고 쉴 새 없이 기침을 해댔다. 나는 가방에 넣어 두었던 새 마스크를 꺼내 그녀에게 주었다. 그녀는 손을 모으며 인사하더니, 그것을 썼다가 이내 눈치를 보며 벗었다. 어떤 비말의 묵은내도 나지 않았을 것이다. 쓴 적이 없으니까. 그녀의 시신경이 포착한 마스크의 구겨짐이 후각을 교란한 점을, 나는 올바로 파악했다. 그런데 왜 고개를 끄덕여 사과하고 말았을까. 너무나도 민망해하는 그녀를 보며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고, 그래, 재인, 지남철과 함께한 그 겨울이 다시금 생각났다. 내가 그를 두고 간 일과, 이후로 만난 병상이 마지막이었던 일과, 그 사이와 이후를 모두 차지한 너라는 사람에 대해서 나는 생각했다. 열차가 대전역을 거쳐 진주하는 내내 나는 지난 일들을 돌이켰다. 썩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일말의 기대가 있었다. 드디어 너를 만나겠구나. 재인, 너를 만난다. 너는 반드시 나타날 것이고, 마침 네가 나타날 시점을 넉넉히 포괄할 인연을 구해 두었다. 지남철의 편지를 책으로 만들어 준 출판사의 직원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성실하고 착한 덕분에, 어렵지 않게 박람회 내내 부스에 머물 자격을 얻었다. 책상 앞에 배너를 놓고 뒤에 숨어 있으면, 너는 내가 있는지 모르고 평대에 들어올 것이다. 나를 피할 이유는 없겠지.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다. 0.01%의 확률로 네가 나를 알아차려 도망친다면, 그때는 감당할 수 없다. 서로 피하자는 약속을 우리는 하지 않았다. 몇날 며칠에 어디에서 다시 만나자고 말하며, 그전까지는 절대로 마주치면 안 된다고 너는 말하지도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두렵다. 만나려고 해도 만나지지 않는 너는 어쩌면 나를 피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불안한 느낌이 든다. 아닐 텐데, 왠지 그럴 것만 같다. 네가 올 것 같던 많은 오늘이 나를 배반했다. 그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왠지 오늘은 네가 올 것 같다. 내 예상은 맞는 법이 없고, 그래서 내가 실패한다는 예상도 틀리는 것이다.' 이러한 발상은 모순을 품고 있다. 내게 성공은 너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네가 오리라는 예상이 맞다면, 나는 약속을 지키지 못할지도 모른다. 네가 계속 오지 않는다면, 너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다.

이 모순의 한심함을 지적할 너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이미 부산인가? 혹시 나와 같은 기차를 타고 있을까. 아직껏 비밀 서고를 지키다 얼어버렸나. 파리해진 손으로 완성한 그림도 같이 하늘에 가져갔을까. 아니면,

아니면, 그래, 재인. 너를 보러 가는 나를 찾아오고 있을까.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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