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여름
1시 24분. 부산역에서 내려 옥외 주차장으로 나갔다. 무언가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는데, 금세 잊어버렸다. 쾌적한 향이 났다. 그것은, 언젠가 조금 이르게 찾아왔다가 스스로 놀라 돌아가던 가을의 바람처럼 아리송했다. 그 조심스런 몸짓에 흐뭇할 수 있던 나는 행복했다. 알면서도 두렵지 않았다. 두려움이 필요 없는 완벽한 행복이 나를 지배했다. 재인, 알고 있을까? 대응이라야만 완벽히 설명되는 개념이 있다. 너를 만나기는 짧았으나, 너를 생각하며 맞이한 그해 가을은 비록 착각이었을지라도 기꺼웠다. 진심을 다해 행복했다.
‘음성 사서함에서 다시 만나는 거야.’
아, 다시 만나자니. 재회는 때로 얼마나 사람을 편협하게 아름답도록 만드는가! 지나고 나서 깨닫는 의식적 미가 아니었다. 시계바늘과 같은 속력으로 현현하던 미다. 어떤 한자도 결국 조촐해지는, 아름다움이란 국어가 있었다.
박선주, 잘가요 로맨스
솔희가 제시간에 나타나지 않은 바람에, 나는 먼저 짐을 두고 마감 이후에나 박람회에 들르기로 했다. 마음이야 하릴없이 조급했지만, 머리를 굴려 보니 빨리 가는 것이 능사는 아니었다. 만에 하나 재인이 나를 의식하여 조심스럽게 그곳에 접근한다면, 나는 그녀를 안심시키는 정도의 간격에서 그녀를 포착해야 한다. 그러려면 박람회실의 구조와 배치를 넉넉히 확인해야 했는데, 사람이 많은 시간대라면 그들 사이에서 재인을 놓칠 우려가 너무 크다. 사람이 없는 시간에는, 재인의 눈썰미가 내 존재를 알아채지 못할 리 없다. 그래, 재인, 어떤 착각까지 했는지 너는 모르겠지. 난 네게 어떤 초능력이 있다고까지 생각했다. 내가 내뿜은 미세한 이산화탄소 입자나 아주 얕은 체취만으로도 나를 알아채는 무자비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고. 만일 그렇다면 너는 반드시 나를 알아채겠지. 어쨌거나 나는 그곳에 갈 것이고, 너도 올 테니까.
무자비한 사람, 쓰레기 같은 말들을 내뱉는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누가 자초한 일인데. 재인, 너는 왜.
아니지. 네 탓이 아니다. 내 탓도 아니다. 객관화나 꾸준함의 기능을 갖추지 못하고 태어나 베르테르마냥 죽어버린 녀석의 탓이다. 본인이 특별하다고 생각했겠지. 얼마간 틀리지는 않았다. 연민의 화신이 되었으니까. 질퍽한 글을 소설로 발간해 주는 친구를 두었고, 그것을 용인하는 더없이 너그러운 애인을 두었었으며, 내가 몇 마디만을 섞자마자 사랑에 빠져버린 여인과 온갖 고상을 떨다 해돋이까지 봐 버렸으니까. 제정신이라면 그녀를 붙잡았을 것이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지남철, 너는 재인을 잡았을 것이다. 네게 지병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나는 믿지 않는다. 병상의 너를 봤지만 세상에는 네 죽음을 도울 약재들만 수많다. 수면제 과다 복용? 왜, "무진기행"처럼 청산가리를 먹지 그랬어. 또 그렇게 단번에 죽기는 싫었는 모양일까. 주변에 고맙다는 말은 해야겠고, 설아의 동정도 얻어야겠으며, 와중에 재인에 대해서는 어쩔 줄 몰랐겠지. 생각했을 것이다. 조은정의 희생 정신을 이용하면 해결되리라고, 지남철, 너와 같은 낭만적인 천재가 생각하지 않았을 리 없다.
요컨대 나는 네 사인(死因)을 믿지 않는다. 너는 자살했다.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사고를 갖고, 첫사랑에게 배격당한 스스로를 견디지 못한 네가, 마침내 깨달은 것이다.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사랑을 오롯이 끝까지 보여주는 단 하나의 공주님을. 손을 내밀기만 한다면 실패할 확률이 없고, 이후로는 아무런 조건 없이 너를 끝까지 애착하는 죽음이란 망부석을.
그러니 네가 묻힌 동백섬의 돌무더기 앞에서 이렇게 적고 있는 나를, 너는 할거(割去)하지 못할 것이다. 죽이고 싶으면 살아 돌아와라. 와서 재인과의 문제를 해결하고 당당하게 다시 죽길 바란다. 이번엔 단칼에 죽겠지. 아니, 반복을 좋아하는 너라면, 이번에도 여러 날에 걸쳐 죽으려나. 뭐, 상관없지만.
"오빠야, 어댜?"
"어, 솔희. 나 동백섬. 문자 보냈는데 못 봤나?"
"아 그래? 여기 넘 바뿌다. 언제 오남?"
"이따 저녁에나 가려고. 거의 마감쯤? 6시 맞지?"
"어. 근데 그때, 아 모르겠다. 그래 그때 보아여."
"사람 많아?"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 수는 없으니까.
"어, 생각보다 만타. 어카냐 진짜."
"왜, 계산 때매?"
"아니 계산이야 뭐 계좌이체하고 이름 적으면 되는 건데, 아 대표 놈이 어디 사라져서 한 시간 넘게 안 와."
걸렸구나.
"아 그래? 이름 네가 적어?"
"어 그게 내 일이야."
"몇 명이나 적었어?"
"..."
불안했다. 나는 물었다.
"왜?"
"비밀이야. 이따 오면 알려줄게."
"아니 그게 왜 비밀이야."
"어 오빠 나 일하러 가야 된다. 그럼 이따 봐 안녕!"
대답도 듣지 않고 솔희는 전화를 끊었다. 순간 화가 치밀었고, 참았다. 지남철의 무덤가에 오기는 이번이 고작 세 번째지만, 나는 올 때마다 어떤 희한한 바닷바람이 이곳을 지배한다고 느꼈고 그것에 낯설게 반응하는 손등을 쓸다 도망쳐 버리곤 했다. 바람 대신 얇은 천이 살갗을 건드리는 느낌이었는데, 잇따라 연상되는 할로윈 귀신이 이곳에 묻힌 망자와 어울려 을씨년스러운 기분이 들던 것이다. 고개를 갸웃하며 뒤돌다 능소화 덤불에 눈을 쓸렸다. 기분 나쁜 느낌의 연장이었고, 나는 그대로 왼편 다리를 건너 해운대 반대편 큰길가로 나갔다. 한때 재인과 함께 거닐고 싶던 바다, 밤마다 녹슨 청록빛으로 하늘을 받치고, 낮에는 흰 수염을 너풀대던 바다가 있다. 엄마가 널던 빨래와 그것을 밝히는 햇살과, 쪼아대듯 나를 부르던 새들을 떠올리게 하는 곳. 존경하고 따른 친구의 생몰을 부정하는 수준에 이른 증오와, 그 증오의 원인이지만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모든 모순의 근원.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것만으로 충분하게 돼 버린.
그래, 재인. 너와 함께 바다를 거닐 수 있었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이렇게, 이렇게 돌이킬 수 없는 사람은 아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