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 없는 이유겠지만

기록들

by 유인도

“사실은 참, 그래요.”

뭐가?

“문득 뒤돌아보면 그때 원하던 대로 살고 있다는 거지.”

택시는 부산항대로의 롤러코스터로 고요히 기울어졌다.

“숨길 줄 알아야 성공합니다. 아까 들어올 때 빨리 가달라고 짜증을 냈잖아요. 물론 금세 누그러지셨지만. 사실 전 상관없죠. 짜증을 내시던, 말던 내 일만 잘하면 되고 그게 자연스레 손님의 기분을 나아지게 할 테지만. 짜증내는 모습을 보이는 건, 아직 프로가 덜 됐다는 뜻이에요.”

운명을 건 여자가 기다릴지 모르는 길 위에서, 기사 양반,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프로가 되는 건 시간을 분배하는 능력이 느는 거예요. 하지만.“

“기사님.”

“하지만, 프로가 아니라 파이오니어가 될 테면, 충동이 유리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사실은 그게 전부래도 괜찮지. 프로는 부드럽고, 파이오니어는 아름다워. 한글로는 개척자. 맞죠?“

기사는 말 끝에 웃음을 피우며 백미러로 나를 흘긋 보았고, 잘 모르겠지만 눈언저리에도 똑같은 웃음이 이는 것 같았다. 나는 마주대고 미소지었다.

“미소가 예쁜 분이네. 언젠가 본 것 같은데.“

무슨 말이냐, 이건 또. 멋쩍음이나 미안함 따위를 감추려는 줄 알지만, 너무 뜬금 없어 어안이 벙벙하기만 하다.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적당히 내뱉었다.

“제가요?”

“응, 언젠가 본 것 같아.”

“아, 닮은 사람을요?”

“아니, 본인일 수도 있지. 내가 여기 말고 다른 데서 택시를 오래 했거든요. 하다가 마누라가 바다는 이제 질린다 살기도 얼마 안 남았으니 거처를 바꿔 보자더라고. 근데 알아보다 보니 또 대도시는 가고 싶고, 왠지 바다가 없으면 허전할 것 같더랬나, 뭐래나."

아내의 흥미를 듣을 생각은 없었다. 우리가 언젠가 만났을 리 또한 없다. 하지만 곧 내리니까 참기로 한다.

“어디서 오셨는데요?“

“강원도, 동해 살았지.”

“아, 그래서 바다 쪽에 사신댔구나.”

“맞아요, 그리고 동해라고 또 지명이 있어요. 모르는 거 보니 그쪽 분은 아니신가 보네. 다른 이랑 착각했나 봐."

"그러게요."

"그때 그 친구들 참 귀여웠는데."

나는 눈을 찡그렸다. 서서히 그만 했으면 좋겠었다. 라디오에서는 옛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잘 모르곘지만 꽤 은은한 올드 팝이었다.

"내 이야기 하나 할까요?"

'이미 넘치도록 했잖아.' 나는 창에 고개를 기댄 그대로 눈만 기사의 뒤통수를 향해 던졌다. 기사는 그것을 동의의 표시로 오해하고 말았다.

"그때가 7월 말인가, 8월인가 그래. 몇 년 안 됐는데 되게 오래된 것 같네. 이젠 안 하는데 그땐 야간을 뛰었어요. 그럼 밤 열 시인가 나와서 다섯 시까지 하고, 쪽잠 자고 두 시에는 다시 나와서 여덟 시까지 하고. 사이에 끼니하고 일 보고 씻어 놓고 다시 열 시부터. 그날도 인제 저문 밤 다아 지나고, 해가 솟을락 말락 해. 유독 그날따라 눈이 침침하더랍니다. 그래도 가야지, 가야지 하다 인제 피곤하니까 속력을 점점 올려요. 뭐, 어차피 사람도 없고 길이야 눈 감고도 다니니까. 저만치 항구 지나고 바다 지나고 인제 대교만 넘으면 됐다... 하는데, 갑자기 몇십 미터 앞에 사람들 둘이 보인 거예요.

"기사님, 혹시 얼마나 남았죠? 조금 급해요, 제가."

"아, 예. 지금 이제 한 십 분 남았어요. 네비 따라 가죠?"

퉁명스러우려던 건 아니었지만, 미안하지 않다고 해도 정당방위겠지. 나는 상당히 참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찾아온 정적은 늘 요상한 주파수로 주변을 자글자글하게 만든다는 것을, 언젠가 배운 것 같다. 나는 말했다.

"죄송합니다. 계속 말씀해 주세요."

"아, 예. 그래서... 어디까지 했던가요?"

그걸 나한테 묻는 건가?

"아, 그래. 사람 둘이 보였어요. 젊은 남녀였는데, 누구랄 것 없이 손을 막 흔들어대는 거야. 고민했습니다. 솔직히 몹시 피곤하던 차여서, 맘 같아선 무시하고 가고 싶었죠. 하지만 청춘이란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형언하지 못할 불굴의 무언가가 늙은이로 하여금 그들 앞에 멈춰서게 하는 것입니다. 브레이크를 밟았죠. 끼익 하고 서자마자, 여인이 창문을 막 두드리더니 말해요. '해돋이를 봐야겠으니 부디 좀 부탁드린다. 시간이 없다.' 아아, 그때 전 어느 시인의 말을 떠올렸던 것 같습니다. '난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걷는다.*'"

국문학도가 따로 없었다. 왜 세상에는 내가 증오하는 녀석을 떠올리게 하는 일들뿐 일어나지 않는가? 많고 많은 사람과, 그보다는 적겠지만 역시나 벌떼만큼 많은 택시 기사들 중에 왜 하필 이 인간과 마주치고 말았을까. 이 얘기를 빨리 끝내고 싶었다. 급히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별 수가 있겠습니까, 태웠지. 그대로 항구를 지나 그들이 원하는 곳으로 데려갔죠. 말 그대로, 씨잉, 하고. 야생마처럼 달렸어."

이때 기사는 왼손을 곧게 내질렀는데, 자기 얘기에 몰두한 그 모습은 안쓰럽지만 감화되는 바가 있었다.

"창문을 딱 이만큼 여니까 안개가 들어오데요. 저만치 해는 뜰락 말락, 역시나 안개에 뭉그러져 아릿한 풍경이었습니다. 남자는 군인이었고, 여자는 남자의 연인 같았는데, 어쨌거나 둘의 밀어를 곁들었죠. 재밌었어요. 어딜 가서 에피소드 삼을 만한 그런, 뭐 근데 재주가 없어 표현하질 못하겠네요."

"재밌습니다. 아직 그런 청년들이 있는 게 나라의 희망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그럴 리가. 네비가 도착 3분 전을 알렸기에 작별인사를 했을 뿐이다. 난 목소리를 낮춰 웃으며 말했다.

"동해, 언젠가 한 번 가보고 싶군요."

"좋지요."

기사는 백미러로 나를 흘긋 보며 아까와 같은 눈웃음을 지르며 우회전 지시등을 켰다.

"다 왔네요. 준비하시지요. 횡단보도 건너면 되시는데, 여기서 내리시겠습니까? 아님 저만치 가서 유턴을 해야 하는데."

난 뒷좌석에서 등을 떼고 오른손으로 조수석 왼편 등받이를 잡으며 말했다.

"우회전인데 못 가는 건가요?"

"앞 차 때문에요."

기사는 말을 마치며 주먹으로 경적을 때렸다.

"하여간 고집 불통이라니깐."

난 다시 뒷좌석에 등을 댔다. 이제 재인과 가까워졌구나. 어쩌면 가자마자 만날지 모른다. 만나면 무얼 말하지? 준비한 말이 있다. 하지만 다짜고짜 그것을 말할 수 있을까? 때로는 오랫동안 준비한 일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어그러진다. 기대가 동반된 준비, 기대와 떼어놓을 수 없는 실망이라는 절대적인 비례.

"엄밀히는 동해가 아니라 속초였습니다. 영금정이라고, 꽤 괜찮은 해변 정자가 있어요. 나도 소싯적에는 자주 갔던, 물론 장가 들고는 못 갔지만. 왜냐? 갔다가 취해서 허튼 소리라도 했다간 끝나는 거니까요."

속초?

"다 왔습니다. 카드 여기 대시면 됩니다."

"아, 혹시 죄송한데 계좌이체도 될까요?"

"아, 네. 여기요."

기사는 계좌 번호와 이름이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조앵실, 신기한 이름이었다. 내 순간적인 의아함을 눈치챘는지 기사가 내 얼굴을 보며 말했다.

"이름이 신기하죠?"

"아, 아뇨."

"제가 원래는 일본 사람입니다."

"예?"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고, 뒷차들이 경적을 울렸다. 수면을 치받는 송사리 무리 같았다. 기사는 뒷창을 흘긋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하아, 저 성질 급한 놈들. 천천히 하세요. 뭐 지들이 어쩔 거여."

"죄송합니다, 보냈어요."

"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나는 이끌리듯 서둘러 문을 열었다. 기사가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아, 그 여성분을 여기서 만났단 얘기를 못 했네. 내 정신 좀 봐."

난 고개를 들이밀었다. 뒷차의 운전자가 문을 세게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그 여자를 여기서 만났다고요?"

기사가 사이드 미러에 고개를 두며 말했다.

"나중에 만나게 된다면 마저 얘기하기로 하죠."

그러고는 살짝 나를 보고 선글라스를 내리며 말했다.

"그 눈만은 당신을 설명해줄 겁니다. 문을 닫아야 할 것 같네요."

그의 손이 변속기로 올라갔다. 난 황급히 고개를 빼고 문을 닫았다. 퍼뜩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눈, 그 눈만은 당신을 설명한다.'

분기탱천한 송사리들이 눈앞을 지나갔다.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카메라를 켜고, 택시가 떠난 쪽을 향해 겨눴다. 택시는 어느새 저만치 좌동으로 가는 좌회선 차선에 서 있었다. 차들이 택시 뒤로 바싹바싹 붙었다. 난 줌을 15X까지 당겼다. 화면이 격하게 흔들렸다. 사정없이 셔텨를 눌렀다. 처음에는 서서, 나중에는 달리며 계속 눌렀다. 망설일 새는 없었다. '딱 하나만 걸려라, 번호판만 알면 된다. 알고 나면, 나는 이번에는 당신을 반드시 잡을 수 있다. 당신,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 나를 놀리고 있는 당신. 무언가 거대한 꿍꿍이속과 어쩌면 빅 브라더 같은 감시망으로 내 행방을 꿰뚫고 있는, 어쩌면 내면까지도.'

택시는 몇십 분 전 부산항대교를 오를 때처럼 부드럽게 기울어졌다. 빨랐다. 그래, 빠를 수밖에 없었다. 계획했을 테니까. 어딘가 거대한 의도가 있다. 내가 모르거나, 알아서는 안 되거나. 적당히 알아서 조종되어야 하거나, 다른 무엇이든 간 이곳에는 분명 의도라는 것이 있다. 그것이 뭐든 나는 지켜야 한다. 나를, 내 약속을, 내가 사랑하는 그녀를.

아니, 아니면.

어쩌면 나는 대단히 큰 착각을 하고 있다.**

분열된 정신과, 상당한 편협을 지니고 있다.

현실을 좀처럼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미쳐 버린 것이다.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은

원피스 6권, 롤로노아 조로


맙소사, 재인, 설마 네가 체리 조를 이곳에 끌고 온 것인가?






*반칠환,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귀멸의 칼날: 합동 강화 훈련 8화: 주, 결집. 키부츠지 무잔.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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