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반향

by 유인도

마르셀 프루스트는 시선과 사유의 단단한 연결과, 그 연결로 도출한 정보에 대한 확신이 사물의 부동성을 결정한다고 적었다.* 시선은 감각, 사유는 이성, 그리고 확신은 감정의 단어다. 예컨대 저 앞의 벡스코가 다른 무엇도 아닌 벡스코인 까닭은, 내가 포착하고 안정적으로 뇌에 입력한 정보가 다른 무엇도 아닌 벡스코이며, 그 정보를 가슴으로 확신했기 때문이다. 뇌의 시선과 사유는 순서쌍이 아니므로, 때로는 사유가 시선보다 먼저 일어나 나는 벡스코 내에 "감각의 비망록" 부스가 있으리라 확신하고, 조금 있으면 그것이 옳았음을 포착하게 된다. 앞서 말한바 확신은 감정의 단어로, 머리와 가슴 모두에서 일어날 수 있다. 다시 말해, 가슴이 뛰어 머리가 돌아가거나 머리가 돌아가 가슴이 뛰는 경우 모두가 가능하다.** 하지만 가슴에 의한다고 하자. 무언가를 멈추는 데는 분명 감정이 동원되고, 그렇게 해야만 프루스트의 말을 사람까지 확장할 수 있다.

그래, 재인. 그날 그 횡단보도 앞에서 나는 숨을 고르고 있었다. 방금 전에 체리 조를 만났다는 사실보다 더 나를 놀라게 한 것은, 행여 네가 나를 막기 위해 그를 불렀을까 하는 추측이었다. 그 추측으로 나는 멈춰 버렸고, 벡스코를 바라보며 그곳에 지남철의 책이 있다고 확신하는 것 이상으로, 네가 곁에 있음까지 확신하고 말았다. 그것은 사유로부터 비롯된 확신이었으므로, 시선으로 매조지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시각이 아닌 무엇이, 마치 바람처럼, 시각만 말고 다른 모든 감각과 연관될 수 있는 무엇이 시선이 굳힐 내 확신을 어지럽혔다. 네게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부동성이라는 개념, 그럴수록 더욱, 내 확신을 완성하려면 내가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존재론이 아니라 역학의 측면에서 말하는 것이다. 내가 그 횡단보도 앞에 언제까지고 가만히 서 있다면, 끊임없이 움직이는 너는 한 번은 포착될 것이다. 레고의 마지막 조각처럼, 그것이 주는 깨끗한 기쁨에 내려앉을 가슴이 여기 불탄다. 가슴이 대체 무엇을 먹으며 이토록 생생히 타올라왔는지*** 단번에 전달할 시선이 있었다.

재인, 두려웠다. 나는 너를 들을 수 있고, 맡을 수 있으며, 네게 만져지고 쓰라려할 수 있었다. 나는 분명 너를 느꼈다. 하지만 너는 보이지 않았다. 느낌으로 치환될 수 없는 단 하나의 감각, 느낌보다 앞서고 절대로 뒤를 내주지 않아 느낌으로서는 다만 바짝 따라붙을 수밖에 없는 시선이란 감각을 너는 허용하지 않았다. 넌 바람이었고, 나는 거기서 오래 멈춰 널 느낄까 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싣고 가지 않는 까닭을 듣고, 네가 품은 히아신스 향기를 맡고, 차디차던 네 손끝의 슬픔만큼 쓰라릴까. 그럼 혹시나 네가 내 형체를 열어줄까, 안개가 되어 잠시 머물지는 않을까. 그러다 흩어지면, 곳곳에 묻은 네 자취를 찾아 내가 다시 너를 바람으로 만들어줄 텐데. 멈추길 바라는 것이 아니다. 멈춰 있는 내게 한 번만 너 스스로를 드러내 주길 바라는 것이다. 차디찬 손끝, 히아신스 향기, 사랑한다는 말처럼 들리던 약속, 그리고 그 밖의 모든 너보다 아름답던 눈망울을 내게 맞춰 주기를. 행여 움직였다가 인파 속에서 너를 놓치고, 확신이 미완으로 굳어진다면, 그 확신은 필경 영원해질 것이며 미완의 영원이 앗아간 지난날을 만회할 자신이 없다. 나무처럼 서서 너를 기다릴 테니, 서 있는 동안 너무 늦지 않게 시린 눈을 맞춰주면 고맙겠다.****

그러지 않겠다면, 나는 다만 보이지 않는 너를 느낄 수밖에 없겠지. 만일 네가 정말 체리 조를 불렀고, 그것이 나를 위험하다고 인식한 까닭이라면 내가 너를 느낀다는 말조차 폭력적이게 되겠지. 하지만 재인, 너와 내 관계는 완결되지 않았고, 약속에 의미를 부여할 정도로는 시작되었다. 너와 나를 우리라고 부를 정도까지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내 생각이 과했는지, 아닌지 아직은 알지 못한다. 재인, 그걸 알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만나야 한다. 너와 나는 같은 공간을 점유했지만 연결된 적은 없었으므로, 우리에게는 단절이 아니라 정리가 필요하다. 비밀 서고에서 너는 나와 활발히 교류했다. 급히 헤어지던 날에는 음성 사서함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다.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으니, 나는 네게 질문할 것을 남긴 채 지남철의 장례를 치렀다. 이후 너를 찾아 다시 비밀 서고로 갔을 때, 너는 없었다. 네가 자주 앉던 자리에는 물이 고여 있었다. 그것이 2024년 여름, 지금으로부터 1년 전의 일이다. 나는 자주 네가 앉던 자리에 갔다. 물은 오래 마르지 않았다. 체리 조에게 네가 어디 갔는지 물었다. 그는 네가 음성 사서함을 찾으러 갔다고 말했다.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 자기도 모른다면서, 한마디 충고를 보탰다.

"사랑은 한 번 생겨나면 절대로 꺾이지 않습니다. 다만 휘어지고, 그렇게 우리가 사랑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은 서로 닮았을지 몰라도 결국 고유합니다."

음흉한 방랑자가 이런 낭만적인 말을 뱉고 말 정도로, 나는 네 눈빛을 사랑했고 어느새 그것을 지니고 있었다. 네가 나를 생각하리라는 자주 반복되던 상념, 나를 찾아올지 모른다는 매번 틀리던 예상, 이밖의 많은 나의 것들은 대체로 너를 향했고 종종 전부를 내어줬다. 그래, 재인. 지독하고 꾸준하게 너를 그렸다. 음성 사서함에 관해서도 수소문했다. 한때는 그것이 전화하라는 말의 쑥스러운 변주는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너는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았고, 국가 전산망을 동원하지 않는 한 네 번호를 알 수는 없었다. 체리 조는 네가 음성 사서함을 '찾으러' 갔다고 말했다. 추측과 수집 끝에, 나는 음성 사서함이 비밀 서고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비밀 서고가 활자의 보고(寶庫)였다면, 음성 사서함은 소리의 보고가 아닐까. 비밀 서고처럼 그곳도 세상 어딘가 숨어 있기 때문에, 너는 찾는다고 말한 것이다. 비밀 서고에 만족하지 않고, 지남철을 위한 제일 완벽한 편지 보관소를 그리기 위해 나를 이용하려 든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네가 아직 지남철을 사랑한다고, 어쩌면 영원히 사랑한다고 말해도 좋다. 다만 휘어질 뿐인 사랑이 그와 나를 분리시키고, 네가 나를 사랑할 가능성을 확보해 준다. 오늘은 바람이 좋다. 왠지 네가 오고 있는 기분이다.***** 그래, 재인. 미완의 희망으로 나는 불타고, 단말마의 완결과 함께 연소될 것이다. 그러니 겁낼 것 없다. 위험한 것도 없다. 너는 멀리서 나타나고, 나는 여기서 사라지리라. 나는 너를 사랑한다. 지남철은 죽었다. 네가 계속 그를 사랑하되,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너를 생각하여 일으킨 불꽃이 내 가슴에 북받쳤으니 후회는 없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고, 떴을 때는 횡단보도 건너편 방지턱에 걸터앉아 밀면을 먹는 솔희가 보였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스완네 집 쪽으로.

** https://m.blog.naver.com/leeseongju1/223053613884

*** 프랑수아 모리아크, 사랑의 사막.

**** 이수동, 동행.

*****유희경, 대화.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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