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춥지 않은 주말 저녁,
책을 펼쳤다. 나의 오랜 습관은 책을 펼쳐서 냄새를 맡는 것이다. 냄새에 따라 책의 탄생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손에 들고 있던 책은 그리 멀지 않은 시간에 만들어졌다 예상하고, 초판 날짜를 확인했다. 역시 따끈한 신작이다. 그렇게 특이한 습관(?)과 함께 독서가 시작되었다.
“어떻게든 더 예술가처럼 보이려고 안달복달하면서 이십 대를 보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소 현실감각이 떨어지고 한창 겉멋에 취하는 나이라고 느긋하게 봐줄 줄 아는 관용이 내게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그런 철없고 무모한 태도가 역설적으로 이십 대를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절로 만들어주는 거라고도 생각하지만,”
-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 요조 p. 7 -
음악을 사랑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는 그녀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바라봤을 때 단번에 예술가구나 라고 느끼도록 살았다고 말한다. 모름지기 예술가는 피폐하고, 처절한 삶 속에서 작품이 나온다는 생각 속에 자신의 삶을 맞춘 것이다. 마치 재즈 뮤지션들이 찰리 파커를 보면서 마약에 손을 댄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과거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초보 트레이너 시절, 누가 봐도 ‘운동인’처럼 보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헐렁한 옷을 입으면 ‘운동인’처럼 보이지 않아서 딱 달라붙는 옷을 입고, 닭 가슴살 샐러드와 고구마를 씹고 다녔다. 나의 이십 대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환상을 쫓는 불완전하고 나약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나이가 들면서 건강한 예술가로 변하듯이, 나도 건강한 ‘운동인’으로 변했다.
그런 생각을 할 즈음 창문에서 상쾌한 바람이 불었다. 추억이 아련하게 떠오르고, 가슴속이 포근해졌다. 읽고 있던 책이 좋아서인지, 바람 덕분이지 모르지만 그때부터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아끼게 되었다. 줄어져 가는 페이지를 보면서 아쉬워했다. 그리고 ‘Between Us’ 제목의 내용을 읽었다. 운동을 모르던 그녀가 조깅의 매력에 빠지게 되고, 운동의 매력을 깨닫는다.
“그런 황홀한 기분은 처음이었다. 내가 사는 삶은 늘 불확실함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고, 기쁨도 있지만 그것은 절대 실력이 차곡차곡 쌓이며 점점 나아지는 종류의 일이 아니었다.”
-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 요조 p. 78 -
30분 넘게 이 책을 손에 붙들고 읽고 있는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의 글 속에서 나의 삶을 보았다. 운동을 만나기 전 나는, 불확실함 속에 있었고 무엇하나 해내지 못했다. 나는 해내지 못하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운동은 느리지만 확실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비물질적인 움직임(운동 행위)을 통해서 눈 앞에 물질(근육)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불확실하던 인생이 확실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음은 조금 안정되었다. 무언인가 해낼 수 있는 사람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런데 슬프게도 운동은 그녀한테 절망을 가져다준다. 더 좋은 기록을 위해서 근력 운동까지 열심히 했지만 발목 부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과거 나를 떠올렸다. 부상 때문에 운동 능력은 점점 떨어지고 절망 속에 살았던 나는, 확실함을 주었던 운동이 불확실함을 준다는 것을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렇기에 그녀가 느끼는 절망을 공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요조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뮤지션답게 일어섰기 때문이다. 운동은, 음악과 책처럼 불확실함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인정한다. 그리고 책을 덮었다. 책이 나를 울리듯, 따듯한 바람이 나의 얼굴을 적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