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이너의 집착

by Nick


그들이(글쓴이 포함) 사는 세계는 설렘과 무감각한 이중적인 감정이 있다. 자신이 채워나가야 하는 숫자가 채워질 때, 그들은 설레는 감정이 가득하다. 그리고 설레는 감정선이 옅어지면 일상은 무감각해진다. 매일, 같은 일상을 보낸다. 숫자의 깊이에 따라서 그들의 감정은 결정되는 것이다. 운동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성장'이라는 것 밖에 없다. 타인(트레이너) 보다 우월한 몸을 가지는 생각, 그것이 머릿속을 지배한다. 처음 운동은 순수하고, 좋은 감정으로 다가왔지만, 어느샌가 감정 속에는 시기, 질투, 분노가 가득해진다. (이것은 운동인가, 중독인가?)


곁에서 매일 인사하고 웃음을 지으며 대화를 나누는 동료는 뒤에서 날카로운 칼을 꽂는다. 모두 '성장'이라는 집착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옆에 나보다 잘난 타인을 짓밟으려 한다. 그 세상은 동물의 세계보다 잔혹하다. 본능이 남은 것이 아닌, 본능 그 이상의 감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시 숫자로 돌아오자. 그들의 인간관계는 숫자와 함께한다. 자신한테 많은 숫자를 안겨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그 외 사람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은 인형이다.(일정한 공간에서) 슬프게도 그들한테 '최고', '좋음'은 물질적인 것이다. 자동차, 시계, 가방 등 존재의 가치가 숫자로 표시되는 물질적인 것들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어쩔 수 없다. 그들이 살아가는 그곳은 철저한 자본주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나는 과거 그들 속에 자연스럽게 살았다. 숫자를 채우기 위해서 웃음을 팔았으며, 인간관계를 철저하게 이용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통장은 숫자로 채워지고, 이름이 가득한 칠판 속에 맨 위에 적혀있는 숫자로 존재했다. 숫자가 채워질수록 떠도는 사람이 생겼다. 곁에 떠도는 공기는 점점 차가워졌다. 내면에 미세한 따뜻함은 꺼져가는 촛불처럼 아슬아슬 사라지기 시작했다. 숫자가 채워질수록 감정은 옅어지고, 밖으로 새어나갔다.


나는 갓 태어난 아기와 닮았다. 아기는 살기 위한 본능밖에 없다. 나의 삶도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아이가 원하는 '모유'와 내가 원하는 '숫자'는 서로 갈망하는 집작에 있어 같은 것이다. 집착을 놓을 수 없었다. 집착은 추상적인 의미를 가지지만, 여러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한 가지 이상의 감정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다양한 집착을 놓을 수 없었다. 다양하기 때문에 더욱 놓기 힘들다. 거기에는 앞서 말했듯이 숫자(돈)가 있다. 그리고 근육이라는 물질이 있다. 나한테 근육은 생애 첫 작품이다. 무엇하나 이루어 놓은 것 없고, 꾸준하게 한 것이 없기에 근육은 내려놓을 수 없는 나의 전부였다. 누군가 그것을 부정할 때, 집착은 더욱 커지고, 분노의 감정만 가지게 되었다. 예전 운동을 같이 했던 후배가 떠오른다. 운동 방향이 부족했던 후배는 나와 같이 운동을 하면서 부족했던 근육을 채워갔다. 그러다 같이 시합 준비를 하게 되었다. 따로 훈련을 하기도 하고, 같이 하기도 했다. 2개월이 지나고 후배는 나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타고나지 못했던 나는 열심히 해도 후배한테 뒤처졌다. 그때부터 좌절의 감적이 싹트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 후배는 겸손한 친구였고, 열심히 훈련을 했다. 그러나 내면 속 싹튼 좌절과 집착은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드리킹' 저자 캐럴라인 냅은 이렇게 말했다.

"술을 마시면 내가 원하는 내가 되었어요.", "오랫동안 술은 나한테 진실에 이르는 길이었어."

술에 중독된 그녀는 자신의 민낯을 드러내지 못했다. 술을 마시면 자신감이 오르고, 타인과 당당하게 대화를 나수 있다. 나는 이 말에 공감했다. 그녀와 나의 차이점은 술이 아니라, 운동이다. 운동을 하기 전 나는 매우 소심하고 남들 앞에서 자신감 있게 말을 못 했다. 남을 피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 갑자기 친구가 전화를 걸어오면 나만의 세계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친구들은 연락을 피하는 나를 비난했고 그것은 더욱 내면 속으로 빠져드는 동기가 되었다. 운동은 나를 내면 밖 세계로 이동시켜 주는 하나의 구원이었다. 술을 적당히 즐기면 문제가 없지만 심하면 문제가 되듯이 운동에 중독되면 시기, 질투가 생겨난다. 모두가 양면성이 있다. 그것을 이성적으로 알지만 내가 만들어 놓은 세상을 벗어날 수 없었다. 집착을 내려놓으면 내가 가진 근육이 사라질 것이란 불안감 때문이다. 근욱이 사라지면 별 볼 일 없던 과거 모습으로 돌아간다. 인정받지 못하던 소심한 모습으로, 나는 이것을 내려놓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던 어쩌면 시간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처음 트레이너를 시작했던 때가 떠오른다. 그때는 운동을 시작한 지 2년 정도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많이 부족한 시기였다. 몸과 마음 모두. 그리고 내가 가진 근육이 눈에 띄게 크지 않았다. 두꺼운 점퍼를 입으면 전혀 운동하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일하던 피트니스 클럽에는 덩치 큰 회원들이 있었다. 그들은 내가 입사하기 전부터 터줏대감 노릇을 하던 사람들이다. 그들만큼 거대하지 못했던 나를, 거대한 그들은 감정적 무시를 은은하게 비추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들과 나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근육에 집착하는 미숙한 중독자였다. 나는 그들과 다른 고결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오히려 그들만 중독되고 정신적 미숙함(오직 많고, 큰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는)을 드러낸다고 착각했다. 내가 가진 집착은 외면했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지 못했다. 중독과 집착의 무서움이다. 둘은 은은하게 다가와서 정신을 잠식해나간다. 생애 처음 나를 자신 있게 만들어 주던 근육은 그들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래서 스스로 감정을 속였나 보다.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속인 채 살아간다. 트레이너들이 숫자와 근육에 집착하듯, 각자 자신이 원하는 물질을 자신에 맞게 집착한다. 그런데 이것이 나쁜 것인가? 웃긴 말이지만 지인들한테 하는 말이 있다.

"결혼하기 전에 여자를 많이 만난 사람은 결혼하면 바람피울 확률이 낮아."

이유는 경험했기 때문이다. 많은 여자를 만나서 다양한 감정을 느꼈기 때문에 결혼하고 다른 여자들이 새롭지 않은 것이다. 앞서 말한 숫자와 근육에 대한 집착도 언젠가는 내려놓을 수 있다. 부질없음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한 경험 속에 있다. 다양한 경험은 자신을 더욱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든다. 근육에 대한 집착도, 숫자에 대한 집착도 정면으로 마주해야만 한다.


요즘 아픔에 대한 것은 피해야 할 감정이고, 편안함만 필요한 감정이라 강조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서 일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고통은 말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던 운동이 직업이 되었을 때, 타인의 시선을 더욱 의식했다. 물론 정신적인 성숙도가 낮았기 때문이지만. 트레이너 직업이 10년 넘은 지금, 행복만 가득할까? 그렇지 않다. 인간은 기본적인 욕구만 누리는 동물이 아니다. 자아실현을 향해 달려가는 동물이다. 그렇기에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다. 다이어트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것이 다이어트다. 체중이 떨어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통을 참아야 할까? 자신이 원하고 좋아하는 모습이 되기 위해서 편안함을 놓고, 고통을 참아야 한다.(물론 매번 고통만 있는 것은 아니다. 환희도 존재한다.) 이렇게 다이어트 조차 편안함만 추구할 수 없는데 직업은 어떨까? 좋아하는 일은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런 과정을 인내할 때 성숙하고, 정교한 사람으로 변모한다. 편안한 현실만 추구하는 것이 나쁘다고 할 수 없지만, 인생의 성숙도가 높다고 단언할 수 없을 것이다. 집착과 숫자를 내려놓은 나의 두 번째 인생은 성숙의 시기였다. 좋아하는 다른 것이 생겼다. 그것은 책이다. 나한테 책은 운동 관련 서적뿐이었다. 육체의 한계를 느끼고 보완하고자 이론적인 부분을 책에서 얻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한 기회로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었다. 때마침 억눌러져 있던 마음을 동요하게 했다. 책은 삶을 변화시켰다. 남들과 나를 다르게 생각하게 만들고,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몇 년 동안 소설, 문학을 많이 읽었다. 그리고 완전에 가깝게 운동, 숫자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나는 새로운 사람으로 탄생했다.

이전 06화가수 요조, 그녀와 나의 공통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