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접촉성 외로움
약간의 결벽증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친구가 "한 입만" 하고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려고 하면 차마 거절은 못 하고 다 먹으라고 줘버리는 편이었다. 내가 자란 90년대까지만 해도 상당수 가정에선 찌개를 한데 놓고 퍼먹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우리 집은 일찍이 각자 국자로 떠먹었다. 간혹 술잔 돌리는 취재원을 만나면 “저는 제 잔으로 먹겠습니다” 할 때까지 뒤에서 몰래 입가를 훔쳐내는 날이 많았다. 엘리베이터 버튼이나 출입구 손잡이는 항상 옷깃을 덧대고 만졌다. 몇몇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인 거리가 긴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팬데믹 직후에는 편한 면이 있었다. 일행과 함께 음식을 나눠먹을 때 덜이용 수저로 배분하며 괜히 정 없어 보일까 눈치 보지 않아도 됐다. 소매를 손끝까지 당겨 천 위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도 유난스럽다는 취급을 안 받아도 돼서 좋았다. 모르는 사람이 불쑥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고 길을 묻는 불상사도 예전에 비해 많이 줄었다고 느낀다.
이런 내가 요즘 접촉을 갈구한다. 집으로 숨어들 때마다 외로움의 층위를 더 세세하게 까보고 있다. 지금까진 다음과 같은 종류의 외로움을 알고 있었다. 나의 생각이 다수에겐 별나고 특이한 취급을 받는 데서 오는 외로움, 즉 이해받지 못한다는 근원적 고독. 주말에 바로 불러내 놀 사람이 없어서 느끼는 심심함에 가까운 찰나의 그것(나는 대개 이런 외로움은 환영한다). 연고 없는 타지에 생김새 다른 이방인으로서 느끼는 호기심에 찬 외로움(자발적으로 이런 환경에 나를 놓는 일을 즐긴다). 친밀하고자 하는 감정이 일방적으로 느껴질 때 오는, 흔히 서운함을 동반하는 외로움. “소원하게 느껴지는 타인의 존재(노르웨이 철학자 라르스 스벤젠)”로 인한 외로움...
내가 발견한 새로운 종류의 외로움은 접촉에 관한 것이다. 연대감이나 소속감만으로만 채워지지 않는 친교 욕구가 있는 듯하다. 물리적 밀접함만이 이를 해소할 수 있다. 요즘의 나에겐 접촉을 대체한 접속, 표정이 사라진 언어만이 남았다. 마스크 너머 상대의 비언어적 표현을 유추해야 한다. 연결은 여느 때보다 촘촘하되 실재감은 없다. 사람이 그리울 때 SNS에 연결해 ‘디지털 젖꼭지(넷플릭스 다큐 소셜딜레마에서 나온 표현)’를 찾아 쪽쪽 빨지만 그건 말 그대로 체온 없는 공갈일 뿐이다.
교제의 단절 없이 매일 사람들과 안부를 나누지만 공허하다. 처음 만난 이와 가벼운 악수,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한 팔로 끌어안으며 표현하는 반가움, 닿을 듯 말 듯 하다 꽉 안아버린 누군가와의 긴장감 같은 것을 정서적 밥으로 먹고 살았나보다.
친구와 깍지낀 채 폴폴 뛰며 호들갑 떨고 싶다. 어린 조카의 정수리에 코를 박고 깊은 숨을 들이쉬고 싶다. 사랑하는 이의 살갗에 볼을 문대고 싶다. 지난주에는 좋은 소식을 들었다. ‘얼싸안고 축하한다’는 관용구가 계속 맴돌았다. 접촉의 황홀경이 아득하다.
안기고 싶다. 누구한테든 안기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지도 모른다. 외로움의 고름이 톡 하고 터져버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