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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영 Nov 19. 2020

자존감 과잉

인스타그램 피드를 죽죽 내리다보면 요즘 사람들이 동경하는 어떤 인간상이 있는 듯하다. 타인의 경계선을 함부로 넘지 않으며, 개성이 뚜렷하나 허세는 없고, 남과 다르게 살지만 불안한 기미는 보이지 않는, 대체로 남에게 친절하되 상대가 무례하게 구는 순간엔 단호한 그런 사람. 꼬인 구석이 잘 없고 자신의 가치를 높게 치는 그런 류의 인간 말이다. 무엇보다 내 사람을 건드릴 때는 참지 않으며, 식당 종업원에게 존대하되 컴플레인은 센스있게 전하는 이른바 '잘 배운 사람'의 태도를 다룬 콘텐츠가 유독 자주 보인다.


'가수 OO이 악플에 대처하는 법', '이별에 관한 배우 OOO의 명언', '모델 OOO이 자신을 위해 아침마다 30분씩 하는 이것' 따위의 것들을 엄지로 죽죽 넘기다 잠드는 날이 많다.


자막 입힌 짤과 함께 나오는 그런 인물들의 면면이 쿨해 보이다가도 저게 뭐라고 저렇게까지 추켜세우나 싶을 때가 있다. 교보문고 매대에 가니 깨알같이 이런 장면들을 인용하며 칭송하는 책들도 나왔다. 나는 내가 비정상이 되어가는 기분에 스며든다.

 

가끔 나는 내가 쪽팔려서 땅으로 꺼져버리고 싶다. 자주 만나는 사람에게도 잘 감춰지지 않는 숫기없음, 뻣뻣했던 일 처리, 부족함이 까발려질까 지레 쌓아올렸던 방어막들, 침묵을 못 견뎌 던져버린 아무말, 어색한 몸짓, 서툰 표현, 나만 아는 나의 옹졸함과 인색함. 이렇게 쓰는 순간에도 부끄러워 결국 스스로 삭제해버리는 나의 수많은 역사들. 뒤돌아 곱씹다가 그때 그러지 말걸 하고 나란 인간이 가진 기질과 정서를 혐오하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나보다 능숙했던 타인이 그런 나를 보듬어 줄 때도 많았지만 그런 사실이 썩 위로가 되지는 않는다.


나는 나의 어색함이 싫다. 나의 뻣뻣함이, 고지식함이 부끄럽다. 앞에서 괜찮다고 하고 뒤에서 손해본 느낌에 잠 못 이루는 나의 위선이 고통스럽다. 나의 나약함을 내성발톱처럼 숨기고 눈치볼 때는 얼른 집에나 가고 싶다. 1년 전 나보다 노화된 내 외양이 불안하다. 모든 일을 미루고 나태지옥에서 허우적거릴 때는 진심 내가 증오스럽다.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내가 외유내강이라고 한다. 겉으로 유해보이는데 내면이 단단하다고. 나를 잘 아는 또 어떤 사람들은 내가 외강내유라고 한다. 내면이 강한건 알겠는데 실은 마음이 여리고 잘 상처받는다고. 나의 마음은 무르기도 하고 단단하기도 하다. 잘 공감하지만 무심할 때가 더 많다. 웬만해선 잘 회복하는 것 같지만 내면 깊은 곳의 피해의식과 화해하지 못해 가끔씩 홀로 욱한다. 자주 상처받지만 실은 사랑받고 싶어서 그런 척 할 때도 있다.


내가 나를 멀리하고 싶은 날이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들 하지만 그건 나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그럴 도리밖에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 허울좋은 이유를 붙여 지금의 나대로 만족하라고, 나의 모습 그대로 다 사랑하라고 하는 자존감 과잉의 시대가 나는 숨이 턱 막힌다.


나는 나의 어색함이 편안하다. 역설적이게도 나의 뻣뻣함과 고지식함의 정도만큼 마음의 문호가 넓은 편이다. 가끔 남에게 위악적으로 굴 때가 있는데, 누군가는 위선이 가장 나쁘고 그 다음이 악, 선, 위악 순이라고도 했다. 셀카 예쁘게 찍힌 날은 그것이 보정 어플의 조력을 받았을지라도 내가 내 사진 보는 게 즐겁다. 이불킥 하다가도 1년 전 나보다 지금 내가 더 뻔뻔해졌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이 내 경계 안에 들어오면 움찔 하지만 그와 친해지고 싶어 호칭을 편히 하자는 운을 어찌 뗄까 돌아서서 고민한다. 지금의 내가 고까워 보이다가도 자기 전에는 나의 성장을 놓칠세라 육아일기 쓰듯 기록한다.


자존감은 상태이지 존재가 아니다. 나의 한 특성이 어떤 날은 한없이 사랑스럽다가도 또 어떤 날은 지긋지긋하다. 하지만 스마트폰 액정 속 사람들은 원래부터 고아한 자존감을 타고난 것처럼 보인다. 고뇌하는 존재의 수많은 밤들은 생략되고 탁월한 태도로 상대의 마음을 끌어들이는 비책만 전수된다. 자존감을 의인화한다면 이런 모습일까 싶은 사람들의 자기 혐오를 상상하는 편이 차라리 나에겐 더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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