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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영 Sep 18. 2020

나의 친구들

“너 친구 없잖아”라는 말에 대한 항변

과거 연인이 했던 말 중에 뭉근하게 상처가 됐던 말은 “너 친구 없잖아”였다. 그를 만나는 6개월 동안 주말에 친구를 딱 한 번 만났다. 당시 내게 베스트프렌드는 남자친구였고 그 애와 보내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고 즐거웠기 때문에 굳이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역시 짧은 기간 동안 나 외에는 만나는 이가 극히 드물었고 어쩌다 있는 친구 모임에는 나를 소개시키곤 했다. 내 친구보다 걔 친구를 자주 봤던 시기였다. 그런 내 맘도 모르고 친구 없고 한가해서 자기만 보는 줄 아는 남자친구가 못내 야속했다.


나는 그 말을 들은 후로 이전에는 생각하지 않던 결핍을 느꼈다. 나는 정말 친구가 없는가? 정확히는 ‘친구 그룹’이 없다. 내 친구들은 점점이 떨어져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셋이 편했다. 중학교 친구도, 고등학교 친구도, 대학교 친구도, 사회에서 만난 친구들도 주로 셋으로 만났다. 하지만 중학교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져 만나면 가족같아도 일상을 시시콜콜 공유하는 사이는 아니게 되었고, 고등학교 친구 중 하나는 어떤 사건으로 인해 관계를 끊기로 했다. 대학교 친구 중 하나는 서서히 멀어졌는데 만나면 반갑긴 하겠지만 굳이 먼저 연락하지는 않는 사이가 되었다. 회사 친구도 한때는 셋이 어울리다 한 명이 퇴사하자 나만 둘을 각각 따로 만나는 사이가 됐다. 그나마 셋이었던 관계도 다 1대1의 만남만 남았다.


그런 사실을 옛 애인의 “너 친구 없잖아”라는 말로 인해 되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이른바 ‘패밀리’처럼 몰려다니는 대여섯 명의 친구 그룹을 질투하게 되었다. 같이 여행도 가고, 경조사 품앗이도 해주며, 서로 일에서는 상부상조하는, 정기적으로 식사나 술자리를 갖는 그런 관계들, 나는 없다. 아니 정리되었다. 이십대 초중반에는 나를 찾는 사람이 많아 괴로웠다. 서너 명 이상의 모임에 다녀오면 심신이 고단해 한동안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몇 번 모임에 안 나가고 은둔하다보니 자연스레 그런 모임들은 해체되었다. 나는 그런 그룹들을 다시 그리워하며, 일에 치이느라 내 관계망이 다 무너졌다고 회한에 빠지곤 했다.


날이 좋은데 어떤 친구를 불러낼까 하다가 마땅히 부를 애가 없어서 외로워졌다. 일기를 쓰며 최근에 만나는 친구들 이름을 적어보았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사람들이다. 요즘은 친구를 만나면 에너지를 얻고 마음이 충만해진다. 예전처럼 기빨린다는 느낌이 없다. 영감을 얻기도 하고 그날의 대화를 곱씹게 된다. 그들이 꼭 오래된 사람들은 아니다. 나와 정서나 대화 코드가 맞는 이들이다. 친구라고는 하지만 나보다 언니오빠, 동생들도 많다. 40대 남성도 있다. 일로 만난 관계지만 분기에 한 번은 보며 기꺼워하고, 집에 초대도 받으며 부인이나 반려견 의 안부도 묻는 사이니 서로 절친이라고 생각한다. 바쁘게 산다고 정작 나는 친구들을 챙기지도 못했으면서 내가 힘든 일을 겪었을 때 그들은 기꺼이 밥을 사고 달려와주고 넌지시 안부를 물어봐주었다. 지금도 고마워서 눈물이 날 정도다. 그렇게 따져보니 친구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많은 애정을 덥석 받아버렸다.


어쩌면 지나치게 인맥을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가 친구의 범위를 한정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상대를 탐구하고 싶은 인간이 아니라 내게 득 되는 인간인지 따져보는 관점을 갖고 있으니 ‘진짜 친구는 고등학교 친구이고 사회에서는 친구 사귀기가 힘들다’는 말을 하는 건 아닌지, 나는 남자들의 의리로 포장된 여러 사모임을 동경했던 게 아닌지 의심해본다. 몰려다니는 친구 그룹이 있으면 인생이 더 재밌어질 거라는 환상, 어떤 이와 갈등이 생겨도 다른 멤버들이 봉합을 도와줄 거라는 착각이 나의 결핍감을 한없이 키워버렸다. 나의 성정을 고려했을 때, 세 명의 집단 관계조차 버거울 때가 있었다. 어떤 그룹이 있으면 나는 꼭 거기에서 나랑 맞는 한 사람하고만 오래 관계를 이어오곤 했다. 굳이 맞지 않는 이와 관계를 이으려는 수고를 하지 않는, 심플한 관계를 추구하는 사람이니 ‘패밀리’ 정도는 양보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관계에서 정서적 결이 맞는 게 중요하고, 한편으로는 새로운 자극에 잘 끌리는 성향인 나는 우연히 스친 사람들이 친구가 되었던 적이 많았다. 내가 그런 인간임을 생각하니 앞으로도 나는 패밀리니 뭐니 하는 그룹은 만들기도 귀찮고 유지하기는 더 버거울 거란 생각도 든다.


사람 만나기 참 힘든 요즘이지만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연락하는 그룹이 있다. 각각 내가 좋아하는 친구를 연결해 만든 모임이다. 내 친구들은 별처럼 떨어져있지만 내가 이으면 별자리가 되는 이들이다. 나의 세계에서는 내가 북극성이다. 내 빛나는 친구들이 나를 이정표 삼아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면 외로움은 너무 찰나의 감정이 되어버린다.


덧, 내게 친구 없다던 옛 애인은 따져보면 ‘패밀리’ 말고 정말 친구가 없었다. 고만고만한 동네에서 같이 자라 비슷한 일을 하고 비슷하게 술먹는 그런 무리 말이다. 그에 비하면 나의 친구들이 갖고 있는 다채로움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보다 내 관계가 빈약하다고 생각했다니 관계의 풍성함에 대한 기준이 사람마다 다름을 새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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