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의 공범은 누구인가
왜 '26만명'에 집착하나요
지난 일주일간 세상이 싫어 무심한 척, 초연한 척 살았다. 뉴스를 외면하고 평소보다 자주 보이는 헛소리도 못 본 척했다. 방어기제였다. 진실을 스치기만 해도 이렇게 욕지기가 나는데 직면했을 때는 얼마나 더 어질어질할지 가늠되지 않았다. 여기에 대해 쓰지 않고는 어떤 글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겨우 노트북 앞에 앉았다.
모두가 ‘26만 명’에 대해 분노했다. 한쪽은 대충이라도 잡힌 엄청난 숫자의 폭력에 참을 수 없다고 했고, 한쪽은 과장된 숫자라며 열을 올렸다. 후자를 말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왜 26만에 그렇게 게거품을 무는가? 뭘 말하고 싶은 건가? 대한민국 남성이 그 정도로 타락하지 않았다고 대변하고 싶은 것인가? 가해자와 선 긋고 싶은 것인가? 자신이 가해자가 아니라면 왜 가해자에 대한 비난에 앞서 숫자에 대해 항변하는가?
텔레그램 ‘n번방’에서 활동한 개인으로만 치면 26만명까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26만명은 ‘박사방’ 등 성 착취 공유방 수십여개 가입자 수로, 한 사람이 중복 가입한 것까지 집계한 수치다. 경찰은 조주빈이 운영한 ‘박사방’ 유료회원만 1만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역시 기함할 만한 숫자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숫자의 실체를 드러내고 싶으면 가입자 수라고 밝혀주면 되는 일이다. 언론에서 경찰 수사가 마무리되기 전에 범죄와 관련된 대략의 수치를 제시하는 일은 흔하다. 중복 집계된 숫자까지 가려내 쓰자고 수사가 끝나기 전까지 함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한 주간 그간 기사의 근거를 보충하기 위해 더 과장된 숫자를 잡아 쓰던 이들이 ‘n번방’ 가입자 수 앞에서 아주 정교해지는 모습을 자주 봤다. 일부는 ‘26만명’을 언급하며 조롱하기도 했다. 그 갑작스러운 정확성이 나는 당황스럽다.
‘n번방’을 입에 올리기조차 힘겨워 목이 콱 막히는 사람들이 있다. 한쪽에서는 ‘n번방’ 사건을 남의 일인양 패러디하고 검찰에 송치되던 날 조주빈이 어떤 브랜드의 티셔츠를 입고 나왔는지를 가십으로 삼는다. 실제로 내가 속한 단체 카톡방들에서 그 온도 차가 극명하게 나타났다. 안전한 공간에서 나는 세상에 대해 성토했지만, 그렇지 않은 공간에서는 입을 닫아버렸다. 체념해버렸다. 이 일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웃고 떠드는 너희들이 다른 세상에 사는 것처럼 느껴져 괴롭고 상처받는다고 말하지 못해 잠 못 이뤘다.
나는 매우 평범한 남성들을 알고 있다. 여자 신입사원의 외모를 두고 순위를 매기는, 자신의 여자친구와 ‘진도’를 “5만원어치의 스킨십”이라고 표현하는, 여성 아이돌의 노출 합성사진을 공유하며 “나는 ㅍㄷ(핑크유두)가 좋더라”고 말하는, 신혼인 여자 상사가 업무 전화를 받지 않자 “떡치느라 안 받나보다”라고 말하는, 너무 고독해서 요즘 여대생이 말 걸어주는 토크바에 다닌다는, 그러면서 “나는 성매매하는 인간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주말마다 클럽가는 친구에게 “아무 년이나 골라먹다가 탈 나”라고 농을 건네는, 하룻밤 잠자리를 한 상대를 두고 “먹고 버렸다”고 소문내는, 와이프가 섹시하지 않아 몇 달째 잠자리가 없다고 고민(?)을 토로하는, 사회 초년생 때 따라간 룸살롱에서 아가씨가 만원짜리 한 장을 줄 때마다 옷을 한 꺼풀씩 벗더니 결국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다는 목격담(을 가장한 체험담)을 풀어놓는, 요즘 여자 기자들은 기개가 없어 룸살롱까지 따라가 취재하지 않는다고 열 내는, 룸살롱에 동행한 여자 동료를 “도시락 싸간다”고 표현하는, 성추행 당한 동료를 두고 “여자 선배들이 잘 다독여주라”고 방관하는, 성추행 가해자에겐 “가장인데 안 됐다”고 동정하는 그런 남성들. 나는 귀를 씻어내고 싶었다. 그들은 나의 동료였고 남자친구이기도 했으며 때로는 ‘일등 신랑감’으로 치켜세워졌다. 한때 내가 존경했던 선배였고, 한 가정의 딸바보 아빠 혹은 애처가 남편이었다. 지금은 모두 조주빈을 악마라고, 괴물이라고 욕하는 이들이다.
반이정(위) 미술평론가와 이우연(아래) <반일종족주의> 공저자가 페이스북에 남긴 글. 과연 이들은 그들이 말하는 '악마'의 반대편에 선 것이 맞는가? /페이스북 캡쳐
동시에 나는 반쪽짜리 인권을 주장하는 이들을 알고 있다. 진보 성향의 반이정 미술평론가는 페이스북 댓글에서 “흔히 ‘피해자’로 퉁쳐지는 70여명의 여성은 보도처럼 순진하고 무고한 여성들이 아니다”고 주장했다(순진무구한 피해자라는 허상, 왜 못 잃는가). 그는 앞서 2012년 박근혜 전 대통령의 출산 장면을 그린 홍성담 화백의 여성혐오를 지적하는 목소리에 대해 “여성 비하는 과잉해석”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당시 우리 사회는 이를 논쟁거리로 보고 그에게 목소리를 낼 신문 지면을 할애해줬다) 나는 이제 진보를 말하는 남성들의 입을 믿지 않는다.
위선 때문에 더 역겹게 보일 뿐 사실 이런 인식은 사회 전방위적이다. “청소년이나 자라나는 사람들은 자기 컴퓨터에서 그런 짓 자주 한다”는 김오수 (무려!!!) 법무부 차관, “내게 딸이 있다면 n번방 근처에도 가지 않도록 평소에 가르치겠다”는 이우연 <반일종족주의> 공저자, 그리고 그를 비판하며 “네 딸이 당해봐라”는 평범한 가부장들. 과연 이들은 그들이 말하는 악마의 반대편에 선 것이 맞는가?
마침 이번주에 읽은 봄날 작가의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반비 펴냄)>은 20여년간 성매매 산업에서 착취당하던 여성의 회고록이다. 가정폭력과 중학교 자퇴, 성폭력으로 이어지는 삶에서 저자는 열 여덟 살에 성매매 업소로 유입된다. 룸살롱에서 시작해 유리방, 보도방, 티켓다방을 전전하다가 20여년 만에야 비로소 그 고리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저자는 “20여 년을 업소에서 일하면서, 그리고 탈성매매 후에도 한 동안은 내 발로 업소를 찾아갔다는 사실이 죄책감이 되었다. 맞아도 내 잘못, 강간을 당해도 내 잘못, 남자에게 버려져도 내 잘못, 성매매를 해도 내 잘못. 모든 것을 내가 감당해야 했다(같은 책, 45쪽)”고 썼다.
지금도 착취 구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피해자들에 대해, 위의 헛소리를 한 이들은 뼈저린 책임을 느껴야 한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 나는 이 평범하지만 내면의 힘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여성의 이야기에 매료됐다. 솔직하면서 단정한 글에도 반했지만 소설같은 서사에 빨려들어갔다.
그러나 어떤 사건을 ‘소설 같다’고 평할 수 있음은 일종의 권력이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에 대해 "저게 어떻게 한 인간의 삶에 다 나타날 수 있는 일이냐. 허구일 뿐이다"라는 뭇남성들과 “저게 바로 내 얘기”라고 하는 이들의 거리감이 아득하다.
내가 속한 사회는, 왜 한 집단의 인간성에 대한 몰이해를 성별 갈등 구도로 인식하는가. 미투 고발 때도 그랬다. 강남역 살인사건 때도 그랬다. 이번에도 똑같이 재현됐다. 26만의 허구성에 집착하는 이들, 만연한 강간문화를 타파할 의지가 전혀 없는, 공범의식을 공유하는 집단들. 당신들은 지금의 사태에 단 하나의 돌도 쌓지 않았다고, 대한민국의 거대한 성 착취 산업에 단 한 번의 발도 담그지 않았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