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 아끼기 연습
나는 왜 그날 차관에게 죄송했나
지난해 교육부 간부들과 출입기자단의 만찬 자리에서였다. 앞서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나는 교육부 국장을 붙잡고 예산 용처에 대해 집요한 질문을 했었다. 그 모습을 지켜봤던 차관이 술자리에서 내 앞에 앉더니 이런 말을 했다.
“유 기자님, 결혼은 하셨어요? 빨리 하시고 애를 낳아보세요.”
교육 정책을 논하려면 애부터 낳고 오라는 소리였다. 미혼 여기자가 교육부 출입한다고 하면 듣는 단골 레파토리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 말을 고위공직자가 뱉었다면 상황은 다르다.
나는 다음날 이에 대해 칼럼을 썼다. 그러나 해소되지 않고 계속 머릿속에 맴도는 의문점이 있었다. 나는 왜 그날 차관에게 죄송했을까.
다시 술자리로 돌아가 그날 테이블에는 차관과 나, 그리고 대여섯 명의 타사 남자 기자들이 앉아있었다. 차관이 말을 내뱉자 그를 뺀 모두가 잘못된 발언임을 인식했다. 나는 "무례한 말씀이시다"라고 대꾸했다. 그런데 다른 남자 기자가 끼어들어 나에게 말했다.
"여기서 울면서 뛰쳐 나가면 다 끝난 거야. 지금 나가셔야 돼요, 지금!"
그러자 모두가 웃으며 상황을 농담으로 눙쳤다. 나의 항의는 무색해졌고, 당사자인 나까지도 분위기에 맞춰 웃었다. 엉엉 우는 모션까지 하면서. 나는 서울로 돌아오는 KTX 안에서 스스로 장단을 맞췄다는 데 뒤늦은 굴욕감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어찌됐든 나는 그날 차관에게 따로 "차관님, 미래 여성 인재를 길러내는 교육부에서 출입기자에게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그는 미안하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술자리가 파하기 전 굳이 차관 옆으로 가 "차관님, 죄송해요"라고 했다. 왜 그랬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잘못한 것은 없다. 하지만 그땐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성차별적 발언에 대해 나름의 예의를 갖춰 지적하고 내 기분을 표현한 것 자체로 나는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
그날 나는 ‘사람들은 대체로 젊은 여자에게 무례한 말을 자주 한다’는, 경험적으로 습득한 통념 외에 다른 것을 알게 되었다. 착하고 상냥하게 돌려말하지 않는 화법에 내가 얼마나 몸둘 바 모르는지를. 나는 이게 한 개인의 성격 문제는 아니라고 확신한다. 여자들은 생애 주기에 있어서 착하게 말해보라는 전방위적인 압박을 받는다.
한 여자 기자에 대해 그의 상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OO이는 일도 잘 하고 성실한데 싹싹한 면이 없어.”
그 상사가 여자 기자에게 기대한 싹싹함이란 무엇이었을까. 그 싹싹함이라는 것이 비슷한 연차의 남자 기자에게도 요구되는 업무 능력이었을까. 그런 언행을 보고 들으며 일을 배우는 나는 어떤 태도를 익히며 성장해왔을까.
나는 최근 일을 하면서 몇 가지를 다짐했다. 30여년을 내면화해온 태도와 말투에 의식적인 변화를 주기로 한 것이다. 가끔 나도모르게 저어하는 마음이 올라오지만 적어도 머리로는 몇 가지 원칙을 세우고 실천하려 한다. 첫째는 잘못하지 않은 일에 쉽게 미안함을 느끼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업무 연락시 굳이 쿠션어를 쓰지 않는 것이다. 부탁할 때 습관적으로 쓰는 ‘ㅠㅠ’, ‘~안될까요?’ 같은 말 대신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같은 직접적인 언어 표현을 하려고 한다. 셋째는 나부터 나의 자리를 존중하는 것이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사회 생활을 시작해서 나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 후배가 많다. 나는 대개 ‘~씨’ 하며 존대한다. 그게 맞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말을 하거나 여자 후배처럼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기에는 내가 불편한 마음이 컸다. 특히나 기혼인 남자 후배에게는 더더욱. 그러나 요즘 나는 내가 나도 모르게 ‘기혼 남성’에 대해 더 예우하는 자세를 스스로 익힌 게 아닌가 의심한다. 나에게 툭툭 반말을 섞어쓰는 한 남자 후배를 보면서 그런 확신이 굳어졌다. 그럴 필요가 없는 관계에서 굳이 나를 낮추지 말아야겠다 다짐하면서도 유독 남자 후배에게 말을 놓는 데는 지금도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해야할 업무 지시를 어떻게 전달할지 말투를 고르느라 시간을 쓴다. 나 스스로 내가 그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지 의심하는 마음에서 불편함이 올라오는 것이었다.
공적 관계에서 여자가 직접적인 말투를 지양하기를 요구 받는다면, 사적 관계에서는 더 나아가 ‘애교 있고 상냥하길’ 기대하는 이들이 많다. 한 남성을 만났는데 그는 왜 자기에게 카카오톡 이모티콘을 붙여주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냥 나의 언어습관이라고, 나는 마음 쓰고 싶을 때만 감정을 표현하는 이모티콘을 쓴다고 했다. 물론 '적어도 너는 아니야'라는 뜻도 담겨 있었지만, 역시 알아듣지 못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굳이 내 앞에서까지 그럴 필요 없잖아요?"
지금도 머리가 어질어질 해지는 공중파 방송의 한 장면은, 남성 MC가 출연한 여성 아이돌에게 “애교를 부려보라”고 요구하고 결국엔 여성 아이돌이 눈물을 보인 일이었다. 응당 남성 MC가 지탄받아야할 일이었지만, 엉뚱하게도 방송 후 여성 아이돌의 태도 논란으로 불똥이 튀었다. 해당 남성 MC는 과거 여성 연예인에 대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성희롱을 일삼았음에도 방송에서 사과했다는 이유로 쉽게 용서됐으며, 시청자가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게스트를 혹독하게 대하거나 비꼬아도 ‘사이다 발언’으로 포장되고 있다. 나는 여성 MC가 그와 같은 태도로 방송 생활을 했다면 일찍이 퇴출되었을 거라고 확신한다.
20대 내내 불필요하게 친절하느라 감정을 썼던 일들만 떠올리면 시간이 너무 아깝다. 상냥을 퍼주고 싶은 순간과 그렇지 않아도 되는 순간을 구분하는 연습을 10여년의 감정 노동과 숱한 무례한 말들을 듣고나서야 시작했다. KBS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주인공 동백은 말한다.
"나는 웬만하면 사람들에게 다정하고 싶어요. 다정은 공짜잖아요."
다정은 공짜 아니고, 주로 젊은 여자에게 과도하게 요구되는 감정 노동이다. 건조하게 말하는 여자들이 많아질수록 상냥하기를 요구하는 입들도 적어질 거라는 희망을 걸며, 나는 오늘도 나의 친절을 아끼고 있다.
*사진 출처는 KBS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