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자주 나에게 무례하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례함, 짱돌을 던지겠어

by 유이영

아빠는 어릴 적 나에게 누군가가 괴롭히면 “짱돌로 훅 쌔려라(때려라)”고 가르쳤다. 유순하고 숫기없던 어린 나를 밖에 내놓기 걱정스러웠을 테다. 그렇게 말해봤자 내가 조약돌 하나 못 던지는 성품이라고 믿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런 노파심은 썩 틀리진 않아서 여러 이유로 나는 짱돌을 날리지 못했다. 어려서는 짱돌 날릴 만한 일이 많지 않았고, 커서는 내가 짱돌을 날리면 상대가 바위를 던지진 않을까 지레 두려운 상상을 하곤 했다. 상대가 개같이 굴어도 나는 우아하게 대화나 법으로 대처하는 게 답이라고 합리화했다. 대화로 풀 선을 넘었으며, 법으로 풀기엔 나의 실익이 거의 없는 중간지대의 상황에서 나는 자주 참곤 했다. 번호를 물어오는 남자에게 “싫어요”라고 했다고 쌍욕을 먹어야 했고, 아래 위로 훑는 불쾌한 시선을 애써 모르는 척 넘긴 날이 많았다.


언젠가 친구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었다. 어느날 지하철에서 한 중년 남성이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고 있었더란다. 예상했듯 그는 친구에게 다가와 시비를 털었다. 그때 친구는 과거 자신이 누군가에게 들었던 호통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내가 누군지 알아!!!”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남자는 당황하며 다른 칸으로 순순하게 몸을 피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어느 여성인들 이 얘기를 듣고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않을까. 이 일화의 여운은 오래 가서, 나는 한동안 불쾌한 일을 마주할 때마다 그녀의 반응을 곱씹곤했다.


최근 길가다 느닷없이 뺨맞는 일들을 겪으며 나는 더이상 예전같은 태도로 살아갈 수 없음을 느꼈다. 짱돌은 못 날리더라도 욕이라도 한 바가지 되돌려줘야 앙금이 남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광화문에서 점심을 먹고 혼자 청계천 벤치에 앉아 평화로운 햇살을 느끼고 있었다. 한 중년 남자가 내가 옆에 놓아둔 백팩을 툭툭 치며 “이것 좀 치워”라고 말했다. 주변에 벤치가 모두 비어있었음에도 다짜고짜 반말로 명령하는 그에게 나는 “공손하게 말해보세요”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빤한 레파토리로 “너 몇 살이야?”, “어디서 젊은 년이”, “너는 늙어봤냐? 나는 젊어봤다” 3연타를 날렸다. 평소같으면 나는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라고 생각하며 자리를 떴겠지만 그날은 그러기가 싫었다. 그가 “시발년아”라고 하자 나는 “뭐, 이 시발놈아”라고 맞받았다. 그 나이대 남성에게 공손한 태도를 요구한 것도, 욕설을 그대로 돌려준 것도 처음이었다. 욕의 영역에서 나의 언어는 빈약하기 짝이 없어서, 비록 그가 한 욕 그대로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정도에 그쳤지만 나는 엄청난 통쾌함을 느꼈다. 평소처럼 녹음기 켜고 꼬박꼬박 존댓말로 받아쳤다면 자기 전까지도 씩씩거렸을 테지만 그날은 잠자리가 아주 가뿐했다.


그리고 며칠 뒤 퇴근길 지하철에서 나는 양복입은 중년 남성에게 또 훈계를 들었다. 내 왼쪽에 앉은 그는 역시 다짜고짜 “다리 꼬지 말라” 삿대질을 했다. 나는 건장한 남자가 다리 꼬고 있었다면 절대 그가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을 것임을 너무나 잘 알았다. 그에게 내 발이 닿은 것도 아니고, 불편했다면 다리 좀 풀어달라고 하면 될 것을 마치 가르치듯 말하는 태도가 무척 짜증이 났다. 나에게 말 걸기 전에 허벅지를 쳐다보는 것도 불쾌하던 참이었다. 심지어 그는 쩍벌남이었다. 나는 “그쪽이나 쩍벌하지 마세요”라고 했다. 그는 내게 “몇 살이야? 젊은 것이 싸가지 없게”라고 했고 나는 “그쪽이 제 윗사람이에요? 왜 반말하세요?”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그러자 그는 “에이, 됐어!” 하더니 자리를 떴다. 거의 모든 무례한 상황에서 자리를 먼저 뜨는 쪽은 나였다. 그런데 무례를 그대로 돌려주는 것만으로도 아저씨들은 당황해했다. 그에게 아마 나같은 젊은 여자의 반응은 처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며칠 사이 일어난 이 두 사건을 들려주자 내 주변 사람들은 “뭐 그런 미친놈이 있느냐”고 했다. 아니, 나는 그들이 정말 멀쩡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멀쩡한 아저씨들이 젊은 여자에게 무례하게 군다. 안 해도 될 말을 굳이 하고, 자격 없는 간섭을 하려 든다. 미친놈이었다면 ‘서울역 폭행 사건’처럼 나를 때렸겠지.


나 말고 많은 여자들이 더 이상 “무례한 자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것이 효과적이지도 않고 빡침 지수만 높인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깨달아가는 듯하다. 또 다른 친구는 길을 몇 번씩 돌아가는 택시기사에게 소리를 빽 질렀다고 한다. 그러자 기사는 존대를 하며 택시 요금도 거슬러줬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많은 여성들이 아무런 갈등 상황이 없음에도 기본적으로 반말하는 남성 택시기사들의 모습을 떠올렸을 게다.


얼마 전 영국 저널리스트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의 <보이지 않는 여자들>을 읽으며 내가 당한 무례함들이 여성들에겐 전 세계적 현상임을 다시금 확인했다. 내가 대낮의 도심에서, 퇴근길 만원 지하철에서 당한 일들은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여자들이 매일같이 공공장소에서 직면하는”, “‘위협적이지만 범죄 구성요건에는 미달하는’ 행동”이다. 나는 그것을 무례한 사건이라고 표현했지만, 이런 경험들이 모이고 연구된다면 하나의 범죄 행위로 범주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 역시 이렇게 여성들이 겪는 사건들이 범죄 분류에서 누락되는 ‘젠더 데이터 공백’ 현상을 각 분야에 걸쳐 찾아내는 작업을 했다. 저서 내용을 조금만 더 옮겨보자면 다음과 같다.


여자들은 매일같이 여자를 불편하게 만드는-대개 불편하게 만들도록 계산된-남자들의 행동과 씨름하고 있다. 그것은 캣콜링에서부터 음흉하게 쳐다보기, “성적 욕설과 이름을 가르쳐달라는 요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 중 어느 것도 범죄 구성요건을 충족하진 못하지만 하나같이 성적 위협감을 가중한다. 감시당한다는 느낌. 위험하다는 느낌. 그리고 이러한 행동들은 실제로 쉽게 악화한다. 여자들은 “웃어, 아가씨,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가 얼마나 갑작스럽게 “쌍년아, 네가 뭔데 나를 무시해?” 또는 ‘집까지 따라와 폭행’으로 변할 수 있는지를 충분히 경험해봤기 때문에 낯선 남자의 “무해한” 발언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나에겐 이 대목이 내가 어제 쓴 일기처럼 느껴졌다. 만약 이것이 지구 반대편 어디에선가 일어나는 먼 얘기처럼 느껴진다면 저자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고 싶다.


여자들이 공공장소에서 직면하는 위협적 행위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 중 하나는 남자들이 남자 일행이 있는 여자에게는 그런 짓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 성폭력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닌 남자는 어디선가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여자들의 그런 이야기를, “나는 한 번도 못 봤는데?”라는 무의미한 말로 너무나 쉽게 일축해버린다. 이 또한 젠더 데이터 공백이다.


고로 나는 다시 한 번 의문에 부딪힌다. 애초에 나는 왜 짱돌을 날려야 하는가? 내가 당한 무례함이 사건이 되지 않는 사회적 조건이 더 문제 아닌가. 참는 것은 너무 빡치고, 짱돌을 날리면 여전히 바위가 날아올까 두렵다. 적어도 참기보다는 조약돌이라도 날려보자는 태도로의 전환이 일어났지만, 정작 전환해야할 주체는 내가 아니다. 내가 겪은 무례한 일화들이 보편적 경험으로 인정되고 사건화한다면 나를 비롯한 많은 여성들은 우아하게 법과 공권력으로 보호받지 않을까 하는 환상을 나는 버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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