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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Jan 04. 2023

귀하에게 사랑 올립니다 (5)

다섯 번째 편지



나의 귀하에게


 새해가 밝았습니다. 안녕하신지요. 우리는 새해의 첫 날을 서울의 대성당 앞에서 맞이했어요. 몹시 좋은 타이밍에 우연하지 않게 발길이 닿은 곳에서 성당 교회의 종소리를 들었습니다. 모두가 사랑하는 홀리 데이를 사랑하는 것에 익숙치 않은 저로서는 어쩐지 타인의 기쁨에 편승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1월 1일의 자정에 서로를 끌어안고 기뻐하는 연인과 가족들 사이에 우리가 있었습니다. 경건하고 신성한 성모상 앞에서 촛불을 켜고 기도 올리는 사람들을 눈에 담기도 했습니다. 교인들이 불빛으로 예쁘게 닦아 놓은 길 위를 걸으면서요. 분위기에 압도 당하는 체험이었습니다.

 적어도 그곳에 있는 동안에는 의식적으로 바르고 건강한 생각만 했어요. 누가 억지로 시킨 것도 아닌데 왜인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어요. 나의 스물 여섯을 떠나 보내면서 지나온 시간들이 어땠는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당신을 만나고서야 더 좋은 사람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올해의 끝에는 다시 돌이켜 생각했을 때 아쉬움 보다 뿌듯함이 컸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이든 늦은 자각은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조금 더 일찍 그렇게 했더라면, 하고 아쉬워 하기보다는 늘상 그렇듯 오늘의 지금에 충실하기로 합시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시작이지 않았습니까? 시작과 끝의 감상이 비슷하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일 년을 잘 살아봅시다.

 아무튼, 우리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가장 큰 변화는 아무래도 함께 살기 시작했다는 거죠. 당신의 이삿날은 어떻게 보냈는지 떠올리기도 막막할 만큼 바빴습니다. 그리고 이틀 정도는 같은 심정이었죠. 청소를 하고 가구 배치를 바꾸고 서로의 생활 습관을 맞추느라고 여념이 없었다는 말 입니다. 나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게 완벽할 수 없다는 불변의 진리를 앞에 두고서도, 우리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편지를 쓰는 지금 시점에서도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았으니 앞으로 두고 볼 일이겠죠. 때문에 단언을 할 수는 없지만 더 이상 나빠지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직까지는 그렇습니다. 주변인의 걱정이 예언이 되지도 않았고요. 걱정이 지나치면 나를 향한 관심이 아니라 저주로 느껴질 때도 드물게 있었습니다만, 요즘에는 그런 형태의 시시콜콜한 잡념도 함부로 끼어들지 못할 정도로 바쁘니까요. 지금의 당신은 작정한 사람처럼 뭐든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그대 노력의 향취는 미소와 포옹 보다도 나를 힘나게 만듭니다.


 다만 열심히 산다는 핑계로 서로에게 소홀하지 않도록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그것을 핑계와 변명으로 삼는 것은 슬픈 일이에요. 다시 한 번 몸과 마음을 정비하면서 선반 위의 먼지처럼 내려앉은 게으름을 깨끗하게 닦아봅니다. 살아있는 모든 순간, 숨을 쉬는 현재의 매초는 한시적이고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이 땅에 발을 딛고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은 증명되는 기적이겠죠.

 시간을 기념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작년을 떠나 보내는 것과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것 모두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축하하는 일이 아닙니까? 정이 많은 인간으로 태어난 덕이죠. 우리는 가끔 시간을 물건에 빗대어서 종종 잃어버리고 삽니다. 혹은 사람으로 의인화를 해서 이렇게 아예 보내거나 새로 맞이할 때도 있습니다. 저번에 만난 친구한테는 잘 대해주지 못했으니, 이번에는 기필코 잘 대접해주리라 결심하기도 합니다. 둘은 분명히 다른 사람인데도 말이지요. 둘은 분명히 다른 시간인데도요.

 요즘 드는 생각입니다.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게 좋겠습니다. 안일하지 않았는지요. 영원히 나를 챙겨주고 돌봐줄 것만 같은 가족처럼 여기고 편하게 대한 것 같습니다. 좋게 말해서 편하다는 것이지 아무렇게나 신경쓰지 않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명백히 따지고 보면 모든 생명에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는 듯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도 한정적이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종종 경험 밖의 일을 우습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슬하에 자식을 두고 있는 사람이 밖에 나와 생활을 할 때에 자연히 남의 자식 귀한 줄 아는 것처럼, 자신이 소중하게 여겨본 적이 있는 소재는 당연히 남의 것도 소중하겠거니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같은 경험이 없으면 특정 상황에서 비교적 타인에게 공감하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신에 시간을 두르고 살아가지요. 인간 사회에서 오가는 배려의 근본을 궁금해 하던 찰나에 문득 떠오른 겁니다. 내가 가진 시간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타인의 시간 또한 귀하게 여길 수 있다고요.


 공교롭게도 오는 내일이 나의 생일입니다. 나는 과거의 어느 해 겨울 아침에 태어난 사람이죠. 저는 생일 즈음에는 항상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과 별개로 생일에만 느낄 수 있는 감정과 분위기를 내켜하지 않습니다. 그건 뭐랄까, 풀 밖에 소화하지 못하는 초식 동물에게 고기를 씹게 하는 느낌이죠. 한 해의 시작과 동시에 맞이하는 나의 생일을 돌이켜서 생각해보면 모든 불행의 시발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첫 단추를 옳게 끼운 적이 극히 드물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언제나 슬프거나 괴로운 일이 생겨서, 무뎌진 나머지 생일 당일에 충분히 아프지 않으면 이질감이 들고 찝찝할 지경이에요. 매년 나의 생일은 언제나 외롭고 슬펐기에, 어느 순간부터는 나는 주저앉아 우는 것과 불평과 원망을 그만 두고서 아예 존재하지 않는 기념일처럼 보내는 게 익숙합니다. 처음에는 분명 어린 아이 같은 기대감이 있었겠죠. 그것이 수 십번 부정 당했을 때는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알아둬야 할 건, 이것이 당신에게 부담감을 얹기 위해 쓰는 문장이 아니라는 겁니다.

 여느 물건에 딸린 제품 사용 설명서처럼 나를 소개하기 위한 문장 입니다. 괜한 오해를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내일 당신의 노력에도 내가 쉽게 웃지 않는 건, 당신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테니 스스로를 탓하지 마십시오. 시간이 필요한 일이에요. 고정관념처럼 틀에 박힌 나의 인식이 바뀌는 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내일은 아닐 겁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는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날도 오겠죠. 이런 나의 모습까지 사랑해달라고 감히 부탁할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미워는 말아주셨음 좋겠습니다.


 내 선물은 그거면 됐네요.


 2023년 1월 4일,

당신의 사랑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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