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자 Aug 12. 2023

나의 모든 자매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담아

영화 <작은 아씨들>, 그레타 거윅, 2019


'자매'라는 단어는 특별하다.


친자매를 비롯하여, 이제는 자매가 된 사이들과, 실제로 얼굴과 이름을 알지 못하나 자매로 칭해지는 이들까지, 그만큼 평등하고 안전한 느낌을 주는 단어는 우리에게 많이 주어지지 않았으므로.

그러나 그 평등과 안전은 또한 아무런 보증 없이 때로 그저 환상이기에, 삶의 어딘가에서 그것이 아름다웠던 만큼의 고통을 남기며 깨어지길 반복한다.

영화 <작은 아씨들>이 성공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 그 아름다움과 고통의 설득력 있는 중첩에서이며, 이 뛰어난 성공이 관객을 19세기와, 지금 여기의 모든 자매들에게로 소환한다.




외로움


조 마치는 영화의 주인공이자 가장 빛나고 자신만만하며 어디서나 시선을 끄는 특별한 존재다. 영화 속에서 그는 고집세고 성질 급한 괴짜이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조가 가진 특별함은 너무나 뚜렷하다. 말하자면 가식과 거래의 세계에서, 그만은 진짜다. 그러나 진짜인 조이기에 로리의 청혼을 거절할 수 있었다고 믿는 관객들의 믿음과는 달리, 그가 다락방에서 어머니에게 하는 말은 뜻밖에도 후회다.


"여자들도 감정뿐만 아니라 생각과 영혼이 있고, 여자들도 야망과 재능이 있어요. 그리고 여자에게는 사랑이 전부라는 그 모든 말들이 이제는 신물이 나고 너무 지겨워요!
그런데, 너무 외로워요."


조가 보여주는 그 모든 흥미로운 특성과 다양한 감정들 속에서, 가장 날카로운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외로움일 것이다. 한 사람의 독립된 개체로서, 스스로를 잃지 않고자 애써온 모든 이들이 도달하는 감정. 화사하고 안온한 유대의 유년 시절을 지나 그와 명확한 대비를 이루는 성인의 삶 전체를 회색 빛깔로 칠하는 상실과 외로움은, 해피엔딩처럼 보이는 이 영화의 마지막이 지나가고 조의 남은 삶에 쭉 함께할 감정이다.

조는 글을 쓰는 작가이지만, 언제나 사람들과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외롭다. 삶의 외로움을 달래줄 동반자를 찾는 것은 그에게 해답이 되어줄 수 없다. 왜냐하면 누구도, 오랜 친구이자 모든 행복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사랑하는 로리조차도 그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소설에서 여자 주인공의 엔딩은 결혼 아니면 죽음'이라는 룰을 공유하는 사회에서 그 룰에 맞춘 글을 쓸 수 없는 작가이자, 그 룰을 발생시킨 현실에서는 언제나 주위에 녹아들지 못하고 모든 걸 망치기만 해온 천덕꾸러기다.

다르며, 다르길 원하고, 달라야만 하는 조에게조차도, 그 외로움은 너무나 치명적이다. 그 다름을 포기한 채 한 남자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행복한 아내가 되고자 선택할 만큼. 외로움과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은 조의 빛을 모두 잡아먹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느 날 저지른 큰 실수 앞에서 '나는 왜 이럴까'하고 절망하는 그에게 어머니는 말해준다.


"어떤 천성들은 억누르기엔 너무 고결하고, 굽히기엔 너무 드높단다."


조는 영화 속에서 거듭 선택받지 못한다. 어린 시절을 함께해 온 절친 로리는 조에게 거절당하자마자 그녀의 자매와 사랑에 빠지고, 유럽에 데려가줄 거라는 생각에 꾹 참고 수발을 들어온 고모는 다른 자매를 고른다. 낯선 도시에서 만난 남자 프리드리히는 그의 글을 혹평한다. 출판사는 그의 소설을 거절한다. 그는 평범하지만 행복한 삶과 위대한 작가의 삶 사이에서, 사랑에 빠진 여자와 독립적인 인간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할 듯이 내몰린다.

위태롭게 설 자리를 잃어가던 조가 그의 천성을 교정하지 않으면서도, 이 현실에 녹아들어갈 방법을 찾는 지점은, '유머'다. 그는 소설의 결말을 출판사가 원하는 대로 바꾸며, 프리드리히를 붙잡으러 기차역을 향해 달려가지만, 그 모든 과정에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흐리며 그 사이를 비집고 다른 상상의 여지를 남겨두는 유머가 있다. 그 덕분에 그의 결말은 고정되지 않으며, 흐르는 세계와 더불어 호흡하여 21세기의 우리에게까지 도달한다. 소설은, 영화는, 진지한 고찰과 더불어 신선한 유머를 타고 삶을 다른 곳으로 향하게 한다. 그는 더 이상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골라잡아야 하는, 어리석은 한 번의 결정으로 평생을 후회로 물들이는, 그런 종류의 선택을 스스로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그 스스로가 강요하지 않는 선택은, 더 이상 사회와 타인이 강요할 수 없다.

세상의 그 누구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모두 이해받을 수는 없다. 그 누구도 타인과 사회와 같은 언어를 공유할 수는 없다. 모두는 각자의 언어로 세상을 볼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외로워진다.

어느 누구도 행복과 신념 중에 한 가지를 택해야 하는 일이 없다면 좋겠지만, 모두는 계속해서 선택해야만 할 것이다. 다만 누군가의 행복과 사랑 / 신념과 가치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그 모두는 혼재되어 끊임없이 다른 빛깔로 흐르고 있다. 반드시 어느 한쪽을 골라잡으라고 자신을 다그칠 필요는 없다. 대신 우리는 결코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지 않는 그 복잡한 삶의 결을 거듭해서 가로지르며 혼란에 빠지기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경계를 넘나드는 유머의 다리를 사용하면서. 영화가 끝나고도 지속될 외로움과 함께.




허영심


"앞으로 내 평생을 착하게 살아가겠어, 그러나 오늘밤만은 즐기게 해 줘."


첫째 멕 마치는 자매들 중 가장 아름답다. 그리고 그것은 그에게 허영심을 갖게 한다. 그는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무도회와, 잘생긴 남자와의 진정한 사랑을 꿈꾸는 여자다.

그러나 그것이 나쁜가?

로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가질 수 있었던 것들을, 멕은 아무리 애써도 가질 수 없다. 그가 단 하루,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을 때, 로리는 멕이 가짜로 가진 환상과 허영심을 비난함으로써 그을 상처 입힌다. 그것도 멕의 진짜 자매이자 친구이자 동료, 조의 시선을 빌려옴으로써. 그러나 로리에게는 멕을 평가할 권리가 없음을 관객은 단번에 느낄 수 있다.

로리의 삶에 아무런 아픔이 없다거나, 로리가 모든 것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다. 로리가 백인 남성이며 부잣집 귀족이라고 해도, 로리에게는 로리가 감당해야만 하는 무게와 아픔이 있고, 로리의 삶은 다른 이들의 삶과 마찬가지로 부조리에 차 있다. 영화는 그것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러나 멕과 로리에게는 각자의 불행이 있기에 삶의 무게가 동일하다고 말한다면, 어설프고 순진한 회피에 불과하다. 멕과 로리가 가진 불행의 사회적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멕은 19세기 가부장제 사회에서, 아버지를 비롯한 남성 보호자를 상실한 채, 가난하게 자란 여성이다. 그런 멕이 사랑이라는 죄책감 없고, 진정성 있는 가치로 묶인 남성 보호자를 꿈꾸는 것은 당연하다. 그가 그 남자가 부유하길, 자신을 가난으로부터 구원해주길 꿈꾸는 것은 당연하다. 그게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길이므로.


다만 멕의 아름다운 외모와 성품은 그 자체로서 권력이 아니라, 누군가의 욕망의 대상이 됨으로써 성취되는 권력이다. 그와 사랑에 빠진 것은 안타깝게도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교사였고, 멕의 불행을 직감한 자매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멕은 그의 아내가 된다. 멕은 진정한 사랑과 로맨스, 평화롭고 행복한 가정 또한 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가 바라던 가정을 얻었음에도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허영심과 싸워야만 한다.


하룻밤의 허영심에 대한 용서를 구하며, 무도회장에서 '앞으로 내 평생을 착하게 살아가겠다'라고 다짐했던 멕의 말처럼, 자매들의 어머니는 실제로 그런 삶을 살았다. 어머니는 국가와 가정을 위해 헌신하고, 자기보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훌륭한 성품을 지녔다. 그리고 자신과 딸들을 가난 속에 남겨두고 전쟁터로 떠난 남편을 원망하기는커녕 그에게 믿음과 사랑을 보낸다. 그러나 자매들의 고모는 딱 잘라 말한다. 네 엄마의 속은 모르는 거라고.


어머니에게도, 멕 마치에게도, 허락된 길은 많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이 아는 가장 나은 삶을 살았을 뿐이다.

아무도 그들의 삶을 판단할 수는 없다. 로리는 더더욱 그럴 수 없고, 조 마치 역시도 그럴 수는 없다. 멕의 말대로, "내 꿈과 네 꿈이 다르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므로. 그저 그녀들에게 '착하게 살 것'과 '아름답게 살 것'을 동시에 들이미는 이중잣대를 경계할 뿐이다.




책임감


이 영화에서 플로렌스 퓨는, 내가 아는 가장 훌륭한 에이미 마치를 구현했다.


에이미에게 평생토록 가장 큰 고통을 준 이는 그의 언니인 조이면서, 동시에 그에게 평생 가장 중요한 이 또한 조였을 것이다. 조는 그녀의 롤모델이자, 라이벌이며, 어울리고 싶은 친구이면서, 인정욕구의 대상이다. 영화의 바깥에서도 자매란 종종 서로에게 그런 존재다. 때로는 서로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앗아가고, 때로는 서로를 가장 큰 위험에 빠뜨린다. 그리고 그것은 가족 내에서 내가 아는 가장 평등하면서도 치열한 관계다. 에이미는 조를 가장 깊게 사랑하면서도 가장 미워하고, 가장 넘어서고 싶어하면서도 미움받고 싶지 않아 한다.


그렇게 자존심, 열등감, 질투가 뒤섞여 언제나 조금은 밉상으로 그려지는 에이미의 캐릭터에, 영화와 플로렌스 퓨는 우아함과 책임감을 불어넣었다.

자매들의 고모가 일깨워주듯, 그들이 사는 사회에서 여성은 독신으로 살거나 가난한 남자와 결혼해서는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고모처럼 '돈 많은' 여성뿐이다. 그 법칙을 깨닫고 스스로와 가족에 대해 책임을 지는 캐릭터는 네 자매 중 에이미가 유일하다. 그는 그들 중 가장 현실적이며, 그럼에도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에이미는 일찌감치 화가로서 자신의 한계를 직시하며, 여성으로서 자신이 가진 한계 역시 알고 있다. 에이미는 여성은 직업을 가질 수 없고, 돈을 벌 수 없으며, 여성이 소유한 돈과 낳은 아이는 모두 남편의 소유가 된다는 것을 입 밖으로 소리내어 말한다. 그리고 그렇기에 그는 로리와 같이 결혼을 낭만적인 로맨스로 볼 수 없으며, 자신에게 결혼은 경제적 거래라고 분명히 한다. 자신을 함부로 판단하는 로리의 말에 멕처럼 상처입기보다, 그 평가를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리고 에이미가 정말 놀라운 지점은, 그 선택의 한계를 또 한 번 직시한다는 것이다. 그는 사랑하지 않는 부유한 남자와의 결혼 또한 화가가 되겠다는 꿈과 마찬가지로 포기한다. 대개 포기는 책임감 없는 행동의 결과이지만, 영화에서 에이미가 보여주는 두 번의 포기는 그가 가진 현명함과 책임감의 반증이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며, 그렇게 내린 선택에 스스로 책임진다.


자매들의 이야기,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가정사를 소설로 써도 되는 걸까 고민하는 조에게 (여성 작가들의 소설을 소소하고 굴곡 없는 사적인 이야기로 치부하며 평가절하하는 것은 지금도 볼 수 있다) 에이미는 말한다.


"많이 쓰면 중요한 이야기가 되는 거야."


에이미는 알고 있다. 더 중요한 이야기가 더 많이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말해진 이야기가 더 중요한 이야기가 되는 것임을. 그리고 말할 수 있는 목소리를 갖는 것,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야말로 권력임을. 누군가는 날 때부터 가진 권력이지만, 그에게는 끊임없이 말하고 말하고 또 말함으로써만 힘겹게 획득할 수 있는 것임을 그는 알고 있다. 그리고 고통스럽지만 그만의 우아함으로 그렇게 할 것이다. 그는 평생을 자매 중 가장 아름답지도, 뛰어나지도, 선하지도 않은, '가장 덜 중요한' 넷째 딸이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영화에서 조와 에이미의 관계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언제나 아름다운 연대의 이야기일 수만은 없다는 것, 거기에는 마찬가지로 강렬한 질투, 증오, 경쟁, 원망이 뒤섞여 있다는 것을 훌륭하게 보여준다. 그들의 가장이라 불렸던 이가, 실제로는 국가 단위의 폭력이나 무능으로 인해 제기능을 하지 못하는 동안, 그들이 나눠 맡았던 힘겨운 짐과 한정된 재원이 그 모든 감정의 소용돌이를 어떻게 더하는지를. 그 가운데서도 착하고 현명한 여성이 되어 사랑받아야만 하는 것은 얼마나 버거운 자기검열인지를. 그리고 그들의 적대적 관계에 프레임을 씌우고 그것을 평면화하는 대신에, 그 안에 얽힌 사랑과 지지와 우정과 연대를 조명한다.




강인함


"얌전히 가지 말고, 끝까지 싸워줘."


베스는 그들 중 가장 선한 사람이다. 그는 자매들 중 유일하게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을 계속하고, 그러다 전염병을 얻는다. 베스가 처음 앓아누웠을 때, 그는 그것을 가족들의 도움으로 이겨내지만, 두 번째는 다르다. 끝내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간 두 번째 투병에서, 베스는 조에게 담담히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였음을 고백한다. 그런 베스에게 조가 청하는 것은 단 하나, 얌전히 가지 말고 끝까지 싸워줄 것.


베스의 선함은 그의 강인함에서 나온다. 모두가 외면할 때도, 힘들고 귀찮고 위험해도, 하기로 약속한 일은 혼자서라도 해내는 것. 그것은 베스의 강인함이자, 어리석음이고, 선함이며, 모든 자매들과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베스의 강인함과 선함의 가치는, 이렇게나 다르고 고집 센 자매들을 하나로 만드는 따뜻함이 된다.


어쩌면 조와 가족들에게 베스는 그들의 아름다운 유년에 대한 추억 그 자체였을 것이다. 자매들이 결혼으로, 유학으로 뿔뿔이 흩어졌을 때, 베스만은 집에 남아 원래의 자리를 지켰다. 더 이상 고향 마을이 어린 시절처럼 찬란하게 빛나지 않음에도 베스는 그들에게 그 기억과 희망이 되어주었다. 베스가 병으로 앓아 죽어가며, 그곳은 빛을 잃는다. 쓸쓸하고 어두운 곳으로 변한다. 그리고 그가 치는 피아노처럼, 언제나 조용하지만 사람들에게 위로와 감동이 되어주었던 베스가 죽은 뒤, 자매들의 유년은 정말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조는 베스를 떠나보내고, 비로소 팔리는 것과 무관한 진짜 글을 쓰며, 그것은 그 자체로 다시 팔리는 글이 된다.

베스가 죽음에 대해 말했듯이, 시간의 흐름은 밀물과 썰물처럼 막을 수 없으며, 그저 지나가는 것이다. 너무도 소중해서 도저히 잃을 수 없는 것일지라도. 그러나 얌전히 가지 않고, 끝까지 싸웠던 이들, 치열했던 이들은 유년의 끝에서 무언가를 얻게 된다. 그 이후에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그 선택에 대해 품위를 지킬 수 있는 무언가를.



그레타 거윅의 <작은 아씨들>은 자매들 각자의 이야기를 선명히 드러내면서도, 그들이 연대하고 갈등하며 통과하는 유년과 어른으로서의 삶을 통해 자매라는 관계를 보다 다채롭게 엮어낸다. 그리고 그 가운데 관객은 저마다 지나간 감정의 밀물과 썰물 뒤에 남겨지는 무엇을 얻게 된다.


나의 경우엔 이것이다.


무엇이든 이룰 수 있을 것 같던 유년 시절은 결국 지나간다. 영원히 유년 시절에 남을 수는 없다. 우리에게 남겨진 잔인함은 그것이며, 또한 우리의 위안이 그것이다.

우리는 이미 어른이 되었다는 것. 스스로 결정할 수 있으며, 그것에 책임을 지면 된다는 것. 너무너무 외로울 때도.







작가의 이전글 하루를 기록하는 즐거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