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자 Dec 18. 2022

애매한 골목에서 갑자기 발견하는 작고 환한 불빛

퇴근길의 독립서점

3. 퇴근길의 독립서점, 오평


방치된 채 바짝 마른 화분에 물줄기가 부어질 때처럼, 쪼글쪼글해진 내 마음의 피부가 쏟아지는 문장들을 벌컥 벌컥 들이켜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곳에 서서 배가 부르고 체할 때까지 책장을 넘겼다.


회사에서 연말 행사를 한 날이었다. 평소라면 가기 어려운 호텔 뷔페에서 점심을 먹고 선배들과 백화점에서 크리스마스 장식이며 접시를 구경하니 마음이 다 대리석처럼 매끈매끈해지는 기분이었다. 단단하고 고급스러운 바닥을 선배의 힐이 또각거리며 걷는 모습, 상냥하고 정중하게 다가오는 직원들, 선반을 가득 채운 레드와인과 의미없이 반짝이는 불빛 장식들이 들뜨게 했다. 사무실 책상에 앉아 한숨을 쉬고 있었을 시간에 호텔과 백화점이라니. 연말은 아름다운 거구나.

오후 네 시가 되자 조금씩 늘어나는 인파를 보며 퇴근길에 돌아갈 걱정이 경기도민을 빠르게 현실로 잡아끌었다. 어쩔 수 없이 버스에 몸을 실은 후에도 이대로 집에 가는 것은 너무 아깝게만 느껴졌고 아쉬운대로 늘 가볼까 망설이던 집 근처의 독립서점을 방문하기로 했다. 사무직의 몸은 이미 지칠대로 지쳤기에 서점이 있다는 어둡고 애매한 분위기의 골목에서 네이버 지도를 살필 때는 그냥 떡볶이나 사서 돌아갈까 싶었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모퉁이를 돌아섰을 때 갑자기 거기 작고 환한 가게가 있었다. 한 가게에서 나오는 따뜻한 기운으로 골목 전체를 다정하게 덥히는 그런 불빛.


조그만 다섯평의 책방 매대를 돌며 거기 놓인 책들을 모조리 조금씩 훑었다. 이 문장에서 저 문장으로 빠르게 뛰어넘으며. 방치된 채 바짝 마른 화분에 물줄기가 부어질 때처럼, 쪼글쪼글해진 내 마음의 피부가 쏟아지는 문장들을 벌컥 벌컥 들이켜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곳에 서서 배가 부르고 체할 때까지 책장을 넘겼다. 한 줄 한 줄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먹어치웠다. 찰랑이는 마음을 담느라 조심스럽게 집으로 돌아가야 할만큼.

대학생 때는 여행을 가도 동네 서점을 찾고 유명하다는 독립 서점은 꼭 한 번씩 가볼 만큼 서점에 가는 걸 좋아했다. 대형 서점에서 쏟아질 듯이 많은 책들을 바라보는 든든함도 좋았지만, 작은 동네 서점에서 주인의 취향대로 들여오고 소개하는 책을 보는 맛이 있었다. 동네 서점을 잘 가지 않게 된 것은 그 감성이 어느 순간 불편해졌기 때문이다.

좋아하던 장소들이, 글들이, 취향과 가치관이 모두 싫어진 때였다. 중심이던 것을 의심하고, 주변의 것에 귀를 기울이려는 시도들이 지겨웠다. 여유롭고 단단한 삶의 태도에 대한 지향이나 비교와 경쟁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기준을 찾으려는 결심도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백화점이나 호텔에 가서 씁쓸한 박탈감과 초조한 도태감을 느끼는 편이 나았다. 거기에는 언젠가 저기 도달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이라도 있었으니까. 좋아하던 독립출판물은 감정이 묻은 유치한 글이나 세상에서 뭐라도 깨달은듯 구는 오만한 글로 보였다.

어쩌면 미웠던 것은 가지지 않고도 행복해하는 마음이었을까. 문단과 출판업계의 인정을 받지 않고도, 그 누구의 승인과 찬탄 없이도 스스로 출판된 글들이 오롯이 서는 것을 지켜볼 수가 없었던 걸까. 흙이 너무 마르면 식물의 뿌리를 잡고 영양을 공급해줄 힘을 잃는다. 마른 땅에서 성장하는 것은 버틸 수 없다. 내 마음은 너무 말라서 좋아하는 것의 방향을 지켜볼 발끝의 균형을 잃고 있었다.


책 네 권과 연말 엽서 6장을 산 나는 집에 가는 길에 손에 들린 무게만큼 마음이 든든했다. 엽서 4장을 샀더니 사장님이 서비스로 고르지 않은 2장을 마저 끼워주신 것도 행복을 더했다. 별로 고민하지 않고 책을 네 권이나 사다니 부자가 된 것 같았다. 게다가 집에 가면 이 책들을 읽을 수 있다니 좋은 일이 남은 퇴근길이란 얼마나 풍족한가. 그러다 문득 예전의 내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평생 볼 책과 영화가 아직도 이렇게 많다니. 이것만 다 보려해도 죽기 전까지 행복하겠다"


그날 매대에 놓인 모든 독립출판물이 내 마음을 사로잡지는 못했다. 여전히 거기엔 유치하거나 오만하게 느껴지는 문장들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어쨌거나 꾸역꾸역 세상에 나온 글들이 건조했던 마음의 습도를 올려주었다. 내가 그것들이 싫어졌건 말건, 여전히 매대를 채우고 애매한 분위기의 골목을 밝혀온 가게와 책들이. 문장들이. 평생 볼 책과 영화의 목록을 더해주는 독립된 마음들이.




※ 글에서 방문한 사진 속의 독립서점은 <오평> 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매일 하루의 삶을 담아내는 단단한 사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