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ry-go-round

03 Litost

by 김유자


​​​​​​​​​​​​​​03

짧은 연애를 몇 번 했다.

사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애인이 주는 것만큼 깊은 상처를 주지 못한다. 내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주는 상처는 다른 상처보다 치명적이다.

연애를 하면서 내가 어떤 것을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지, 어떤 것이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알게 됐다. 이렇게까지 힘들게 알아야 하는 것이라면, 정말 중요한 거겠지.

연애가 종료될 때마다 그것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뭔지 깊게 새기라는 뜻으로 인연을 만난 것이다. 그러니 잊지 말고 기억하고 다음엔 실수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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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부끄럼이 많았다.

나를 만나러 올 때 꼭 항상 작은 선물을 들고 왔다. 그 모습이 돌을 주워다 주는 아델리 펭귄 같아서 무척 귀여웠다.

겨울이라 추운데도 약속 시간보다 일찍 나와서 항상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웃는 게 예쁘고 어깨가 넓고 손이 따뜻했다. 남자가 웃는 얼굴이 이렇게 예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처음 만났던 날, 특이한 식당 사장님 때문에 당황스러운 순간에도 인내심이 깊고, 성품이 착하고, 바르고, 따뜻한 사람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첫 데이트인데 너의 얼굴은 하루 종일 굳어 있었다.

약속 시간에 늦어버린 내 탓이었다. 화장실에서 이마를 세게 치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내가 망쳐버린 것 같아서 울고 싶었다.

스스로가 답답하고 속상해서 괜히 맥주를 빨리 마셨다. 술을 잘 못 먹는 나는 취기가 조금 올라버렸다.

집에 가는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나에게 "내 이름이 뭐라고?"라고 물었다.

아까 술에 취한 내가, 이름이 비슷한 내 친구의 이름으로 잘못 부른 탓이다.

나는 웃으며 너의 이름을 불렀다.

하루 종일 굳어있던 네 얼굴이 갑자기 눈부시게 웃었다.

예쁘게 웃는 얼굴을 본 순간, 시간이 멈추고 우리 둘만 그 안에 멈췄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순간 술이 깨고 시간이 멈춘 것처럼 우리 둘과 현실이 분리되는 것을 나는 보았다.

네가 웃는 얼굴을 계속 보고 싶었다. 나는 이 사람을 계속 웃게 해줘야겠다. 네가 마음 놓고 웃을 수 있게 내가 지켜줘야지. 그런 맹세를 혼자서 했다.

너는 손을 잡으면 꼭 다시 고쳐 잡아서 손깍지를 빈틈없이 꽉 잡아줬다.

목소리가 좋았다. 노래도 잘 불렀다. 통화 중에 노래를 불러달라고 했더니 부끄러워서 안 된다고 했으면서 노래를 녹음해서 보내주기도 했다.

내가 대단한 걸 하지 않아도 나에게 늘 멋있고 똑똑하다고 말해줬다. 정말 별것 아닌 것도 크게 칭찬해 줬다.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에게 부끄럽지 않게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지, 너에게 어울리는 좋은 사람이 되어야지,라고 매일 일기에 쓰곤 했다.

나의 호의를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잘 알아줬다. 나의 호의와 의도를 오해 없이 가장 온전하게 이해한 최초의 사람. 그리고 유일한 사람이었다.

너랑 있으면 따뜻하고 포근하고 설레고 떨리는데, 편안하고 마음이 가득 차올라서 풍족한 기분이 들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넘치게 따뜻한 한 달이었다.



네가 어느 날 나에게 말했다. 나는 네가 바라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미안하다고 다 내가 잘못했다고, 나는 뭘 잘못한지도 모르면서 미안하다고 매달렸다.

네가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우는소리를 듣는데 내 살 갗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너는 분명 나를 좋아하는데 왜 헤어져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울고 미안하다고 매달리기도 하고 너 진짜 나쁜 사람이라고 욕도 했다.

너는 슬프게 울면서도 붙잡히지 않았다.


헤어지고 나서, 나의 모든 행동들이 다 후회가 됐다.

내가 상대방을 배려하지 못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가 한 달 동안은 굉장히 바쁠 것 같다고 말을 했다.

나는 알았다고 무리하지 말라며 대답은 어른스럽게 했다. 그러나 대학원생의 하루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뭐가 얼만큼 어떻게 바쁜지 전혀 몰랐다.



연락이 뜸해지자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화장실 갈 시간도 없는 건지, 핸드폰 한 번 들여다볼 시간도 없는 게 말이 되는지, 밥도 안 먹는 건지,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진실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불확실성을 못 견디는 뇌는,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상상을 했다. 그러다 점차, 나에 대한 관심이 없어졌구나. 나에 대한 애정이, 마음이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락은 없고, 납득할 만한 구체적이고 충분한 설명도 없었다. 내가 가진 정보만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은 그게 전부였다.


그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고, 늦은 저녁에 한 시간 거리를 고민 없이 달려오기도 했다. 그러나 연락은 다시 뜸했다. 불안이 폭발했다. 그렇지만 너를 잃고 싶지는 않았다. 불안을 혼자 해소하는 방법을 몰랐던, 미숙하고 어린 나는,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과 의미 없는 약속에 많이 나갔다.

그날도 앉아있을수록 더욱 공허해지는 술자리에서 술을 홀짝대다가 새벽이 되었다. 겨우 잠에 든 그에게 전화해서 보고 싶다고 땡깡을 부렸다. 지금 다시 생각하니까 너무 애같고 창피하고 부끄러운 짓이다.

며칠 뒤, 너는 나에게, 나는 네가 바라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헤어지자고 했다.

나와의 미래가 그려지지 않는다고 했다.


너는 나를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너의 눈에 비친 나는, 약속이 일주일에 2-3개는 되고 매 약속마다 술을 마시는 인싸에다가 유행하고 자극적인 것만 찾아다니는 어린애였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평생을 거의 혼자 지내와서 제대로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조차 없었다. 그를 만났던 그 두 달 이 내 생애 통틀어서 약속이 가장 많았고 주변에 사람이 가장 많았던 두 달이었다. 왜인지 이상하게 그를 만나기 시작했던 그 두 달 동안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몰렸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와 이별함과 동시에 내 주변은 다시 고요해졌고 다시 소란스러워지는 일이 없었다. 마치 꿈을 꾼 것처럼.

네가 보았던 나는 표집 편향이나 과적합의 오류였다. 노이즈가 많은 특정 구간을 보고 상수라고 착각한 것이다.


너는 나를 모른다.

그렇게 너는 나를 오해한 채로 우리는 이별했다.

아마 나 역시도 너를 잘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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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는데도, 내가 원하는 것을 네가 채워주지 못한다고 판단을 했었던 걸까.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지 못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가?

나는 고양이를 키우면서 이 기분을 느껴보았다. 내가 너무 부족해서 고양이를 불행하게 하는 것 같다, 고양이를 더 좋은 사람에게 보내줘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자아효능감이 바닥을 친다. 스스로가 싫어지고 한심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고양이를 버리지 않았다. 어쩌면 다른 집에 가서 더 부유하게 살 수도 있겠지만, 고양이에게, 내가 너를 버렸다는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나의 고양이에게 그런 슬픔 따위는 알게 해주고 싶지 않았다.

영원한 이별의 상처를 안고 사는 것과 조금 모자란 삶 중에서 나의 고양이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따뜻한 곳에서 자다가도 내가 침대 끝으로 멀어지면 굳이 나를 찾아와서 몸을 맡기고 풀썩 누워서 치대는 것을 보면 내 고양이는 나와의 삶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그렇게 나는 나의 고양이와 동행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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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지고 2주 뒤에, 내가 그토록 애정했던 영화관 알바를 그만두었다. 술을 취할 때까지 마시는 것도 그만두었다. 몸에서 거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술자리에 가는 것도 그만두었다. 아무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고, 시간이 아깝고 돈이 아까웠다. 그리고 깊은 붕괴를 맞이했다. 운동을 주 6일을 갔다. 그러면서도 붕괴는 멈추지 않았다.


아주 나중에 문득 떠오른 생각은, 내가 배려를 못한 것도 맞지만, 우리 둘의 타이밍이 어긋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당시의 우리는 어긋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그때 나는 자아를 잃고 방황하는 중이었다.

정말 하고 싶은 꿈이나 내면의 소리는 차마 들여다볼 용기가 없었고, 그것을 덮어두고 외면한 채, 그것이 불쑥 올라올 때마다 사람들을 만나거나 바쁘게 사는 척하며 회피하고 있었다.

반면 그 사람은 꿈을 이루기 위해 혼자 대부분의 밤을 새우며 고독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삶이, 대학원생의 삶이 어떤 건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나는 스스로의 내면으로 향한 문을 닫아뒀고, 그는 자신이 외부로 향하는 문을 닫아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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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얼굴만 보아도 어떤 감정인지, 어떤 마음인지 너무 잘 보였다. 다른 사람들 표정은 아무리 봐도 속이 어떤지 모르겠던데 왜 너만 잘 보인다고 느껴졌을까.

그 사람이 내 앞에서는 감정이나 표정을 크게 숨기지 않았던 것도 있다. 또 하나는 내면이 나랑 많이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이해가 됐다. 번역 없이 읽을 수 있는 언어 같았다.


내면은 비슷했지만 외부로 표현하는 방법은 정반대였다. 나는 솔직하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를 좋아했고, 그 사람은 언어로 표현하는 것에 있어서 항상 여러 번 고민하고 절제하는 편이었다. 그것이 신중하고 또 진중하게 느껴졌다. 그런 부분을 닮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날은 네가 그런 말을 했다. 같은 연구실 사람들이 너에게 밝아졌다는 말을 했다고.

그때 내가 말하지 않은 것이 있는데, 나 또한 주변 사람들에게서 온화해졌다는 말을 들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물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너는 나의 밝은 면이 좋다고 했다.

나는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있어.

너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도 네가 삼켰던 말은,

근데 그 어두운 면은 내가 감당하기 힘들어. 였겠지.

너는 인생 첫 연애였고, 너 스스로의 상황도 버거웠을 테니 그것은 당연한 거다. 그것을 부채로 안고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는 대단히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과정과 감정을 느꼈던 것이라고, 언젠가 이 말을 전할 수 있다면 좋겠다.


내가 그의 바쁨을 이해하지 못했던 이유는, 납득할 만한 자세한 설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나의 어두운 면을 이해하지 못한 이유 역시, 내가 설명한 적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 둘 다 그때의 스스로를 용서해 줘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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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사람을 만나고 나의 내면으로 향하는 문이 열렸고, 그는 외부로 향하는 문을 열게 되었다. 서로가 서로의 닫힌 문을 열었지만, 나는 나의 내면을 핑계 없이 직면할 만큼 강하지 않았고 그는 외부 세계를 감당할 여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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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여러 번의 연애를 해봤지만, 연락이 잘 되거나 조건이 좋은 사람을 만나도, 서로의 결이 맞거나, 나의 호의나 의도를 오해 없이 이해하거나, 마음이 가득 차오르는 느낌이 드는 사람은 없었다.


너의 꿈을 계속 꿨다. 어떤 날은 울면서 잠에서 깨기도 했다. 시간이 많이 흘렀고 이제 다 잊은 줄 알았는데 꿈에는 계속 나왔다. 마치 자기를 잊으면 안 된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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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장황한 말들로 이런저런 추측을 해도, 이런 말들은 자아 보호 기제로 인한 인지적 오류에 불과했다. 내가 확언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그가 한 말만이 진실이었다.

나는 네가 바라는 사람이 아니고, 나와는 미래가 그려지지 않고, 너는 나를 다시 만날 생각이 없다는 것.

그가 나를 떠난 이유들을 여러 글로 장황하게 늘어놔봤자, 그가 떠난 이유는 그저, 연인의 힘든 상황을 무시하고 자신의 감정 표현하기에만 바쁜 나의 이기심에 한계를 느끼고 떠난 것. 그 단순한 이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살다가 가끔씩, 그때 느꼈던 마음의 풍족함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 그때 썼던 일기를 들춰본다. 내가 그렇게 사랑받고 행복했던 때가 있었다.

너도 그때를 사랑받았다고 기억할까.

내가 너에게 사랑을 제대로 준 적이 있었나.

나의 일방적인 사랑 방식이 너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을까.


네가 열어준 내면의 문을 따라 나는 여기에 왔는데, 너는 내가 연 외부의 문을 따라 어디에 도달했을까?

봄의 네가 어떤 모습인지 정말 궁금했는데 봄의 너는 어떤 모습일까.



이토록 유약하고 미성숙한 두 사람이 만나 자아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자아를 구축하는 그것이 나의,


첫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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