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화이트의 ‘산티아고 순례길’
퇴사를 하고 여행을 시작하면서부터 책을 읽는 시간이 많아졌다. 예전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긴 했지만 과거엔 어딘가 책을 읽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있기도 했었던 것 같다. 책을 읽어야 될 것 같은데 재밌기도 하니까 읽어야지, 뭐 이런 마음이었달까. 그렇지만 요즘엔 의무감 없이 정말 책이 재미있어서 자주 읽는다. 책 읽기가 요즘 하루 일과의 절반은 차지하는 것 같다. 책의 내용뿐 아니라 작가마다의 고유한 문체를 탐구하는 것도 재미있고 소설, 시, 에세이, 잡지 등을 가리지 않고 여러 방식으로 책 읽기를 즐기고 있는 요즘이다.
아마도 퇴사 후 여행을 하며 좋아하는 공간에서 책을 읽는 순간들을 아주 사랑하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책 읽는 즐거움을 더 알게 된 것도 같다. 여행 중에 혼자서 가만히 책을 읽다 보면 여행으로 왠지 붕 뜨던 마음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뿌리를 내리는 듯했다. 내 마음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고요하게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나와 책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공간은 덤이었다. 그 공간은 한낮에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테라스이기도 했고, 빗소리가 들리는 카페이기도 했고, 때로는 고요한 밤 자기 전 침대가 되기도 했다. 나는 혼자 여행을 하며 이런 시간을 꽤나 많이 가졌다. 분명 여행하며 내 삶의 면적이 넓어지는 데에 한몫을 한 시간들임에 틀림없다.
요즘 읽고 있는 시집에 담긴 데이비드 화이트의 ‘산티아고 순례길’이라는 시를 소개하고 싶다. 여기에는 내 눈길을 머물게 한 이런 구절이 나온다.
너는 줄곧 마지막 종착지가 황금으로 된 탑들과
환호하는 군중이 있는 도시일 것이라 상상했었다.
하지만 길의 마지막 모퉁이를 돌았을 때
네가 발견하는 것은 그저 하나의 단순한 이해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는 너의 얼굴에 담긴 분명한 깨달음
그리고 또 다른 여행에의 초대장.
비록 나는 800킬로미터의 길을 걸어보지는 않았지만, 이 시에 나오는 ‘길’은 우리의 모든 여행에 해당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여행이 끝난 뒤 무언가가 아주 드라마틱하게 바뀌지는 않았다. 내가 사는 이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이고, 나도 여전히 나로서 숨 쉬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의 단순한 이해’, ‘분명한 깨달음’. 어쩌면 용기를 내어 발을 떼지 않았으면 몰랐을 수도 있던 것들. 이 확실한 무언가가 내게 남겨졌고 이것들은 내 삶에서 분명한 흔적을 남긴다. 내가 얻은 깨달음이 계속해서 내 삶에 녹아들길 바란다. 그래서 훗날 내 삶을 바라보며 더욱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그렇게 내 삶이 겹겹이 두꺼워질 수 있게 해주는 무언가로 두고두고 남기를 바란다.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에는 황금도 없고 환호하는 군중도 없었지만, 발걸음이 가볍고 마음이 충만해진 내가 서 있었다. 그런 나를 마주하며 내 지난 여행을 또 한 번 긍정한다. 그리고 또 한 번 용기를 내어 발걸음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