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2019년 1월 19일
사실 2년 차 디지털 노마드 여정을 떠나면서 내가 한 가지 도전해보고 싶었던 것은 펜으로 글쓰기였다. 거처와 장소가 안정적인 사람들에게는 컴퓨터로 글 쓰기가 매우 편하겠지만, 비행기와 같은 교통수단에서 시간을 많이 쓰고 개인 공간(내 방) 없이 언제나 타인(남자친구 B)과 함께 지내는 나에게 있어서 혼자 오롯이 앉아 생각에 집중하고 글을 쓰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펜으로 글 쓰기인데, 펜과 노트가 있으면 아무데서나 쓸 수 있다는 기동성이 빛을 발할 것이라는 발상에서였다. 하지만 펜과 종이를 사고 막상 쓰려고 앉았더니 초딩 1학년의 일기 같은 글이 나왔다. 필기의 속도가 생각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니 결국 문장을 시작하고 나서 머릿속에 남는 것은 아주 단편적이고 기초적인 단어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집중력의 한계는 여기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이 곳에서 글을 써보기로 한다. 이게 퍼블리싱이 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럴싸한 말로 여행을 잘 포장할 수도 있겠지만 내 여행은 멀겋게 드러난 생활이라 포장할 건덕지가 없다. 그냥 내가 하는 이야기들은 겨울에 이탈리아에 오면 오렌지가 맛있다거나, 로마의 바닥은 미끌미끌한 돌로 만들어져 있어서 비가 오면 몹시 미끄럽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거나, 요가원 이야기, 먹은 밥 이야기, 뭐 이 정도가 될 것이다. 그중에서 내가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건 요가 이야기이다.
사실 작년 발리에서 지내면서 B를 따라 무에타이와 주짓수를 배웠다. 주짓수는 내 취향이 아니었지만 무에타이는 정말 재미있게 배웠다. 그러던 차에 오토바이 사고가 크게 나고 발목과 무릎을 다치면서 킥을 할 수 없게 된 것이 요가로 갈아타게 된 계기였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요가를 하기 시작한 이후 나는 발리/방콕/한국 세 곳에서 요가를 수련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미국에 있었던 기간을 제외하면 1주일 이상 요가를 쉰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미국에서도 언제나 요가 매트를 사용할 수 있는 환경에 있었기 때문에(운이 좋았다) 셀프 수련으로라도 몇 가지 시퀀스를 해오기도 했다. 이탈리아에 와서도 요가원을 찾아 구글을 검색해보았다. 동네에는 홈페이지가 이탈리아어로만 된 요가원과 영어 버전 홈페이지를 따로 둔 비크람 요가원의 두 종류가 있었다. 워낙 B가 비크람 찬양을 해왔던 터라(나는 아쉬탕가를 좋아한다) 영어 홈페이지=영어로 수업이 진행될지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비크람 요가로 향했다.
비크람 요가에 드롭인을 끊어 가보니 비싼 가격(드롭인 20유로)에 매트 대여비를 따로 받고 (엄청 구린 매트였다. 땀이 많이 나는 비크람 요가 특성상 논슬립 매트가 필요한데 그냥 시장에서 3천 원에 파는 가장 싸구려였다) 샤워실은 지독한 물때 냄새가 나는 데다가 결정적으로 수업 퀄리티가 너무 좋지 않았다. 좌절한 채로 혹시나 해서 더 가까운 곳에 있는 요가원에 영어로 문의헀더니 영어로 답변이 왔다. 일주일에 두 클래스를 듣는 데 한 달 60유로, 세 클래스를 들으면 한 달 80유로라고 했다. 참고로 비크람은 한 달 150유로였다! 그렇게 60유로를 지불하고 아쉬탕가(!) 클래스를 듣기 시작했다. 독일에서 온 선생님은 기본적인 영어 소통이 가능하셨고, 나는 아쉬탕가 시퀀스 중 최소한 스탠딩 시퀀스는 외우고 있었기 때문에 무척 수월하게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퍼펙트한 화장실/샤워실에 따뜻한 차가 언제나 준비되어 있고, 언제나 맞아주시는 엄청나게 친절한 선생님들이 계신 데다가 매트도 공짜! 보석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약 2주째 수업에 나가고 있는데, 지난 수요일 아쉬탕가 수업에 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미용실에 다녀왔다. 태어나서 최악의 파마를 하게 됐다. 이 이야기는 또 나중에...) 금요일에 두 클래스를 들었다. 아쉬탕가 전 수업도 내 기억에는 독일 선생님이 가르쳐주셨던 걸로 기억해서 듣겠다고 한 건데, 원하는 느낌의 수업이 아니었다(예컨대 수르야 나마스카라 A를 한다고 했으면서 B를 한다든가).
내가 아쉬탕가를 좋아하는 건 우선 시리즈가 여러 가지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몸의 익숙한 정도에 따라 대안이 되는 포즈가 있다는 친절함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물론 프라이머리 시리즈 중에도 아직 할 수 없는 아사나가 아주 많지만, 전굴을 그나마 잘하는 나에게 전굴 위주의 아사나가 많은 아쉬탕가는 성취감을 준다. 또 시퀀스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시퀀스 암기를 통해 몸을 움직임에 따라 명상을 할 수 있다. 생각을 비우고 호흡에 집중하면서 정해진 동작을 하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정신과 몸을 일치시키는 경험을 선사해주었고, 요가는 이러한 일치를 지속시키고 완전한 성취감을 주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다 같이 옴 사운드를 내는 것도 낯간지러웠고, 아사나를 하면서도 내가 하는 게 맞는 건지 헷갈려 어색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은 삐걱이는 몸을 붙잡고 조금 더 배우기 위해 낑낑대며 골반을 여는 그 모든 과정이 즐겁다.
사실 여행을 하면서 요가를 한다는 건 이상적인 방식은 아니다. 자기와 스타일이 잘 맞는 요가 선생님과 함께 몸을 살피고 방향을 잡아가며 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막 요기니가 된 만큼, 지금의 과정을 어쩔 수 없는 결정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맞는 스타일을 찾아 나서는 긴 여정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여행을 하지 않았다면 아쉬탕가를 배우지 못했을지도 모르고, 인도에 가서 수련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요가 자체를 그냥 운동의 일종으로 생각하고 가볍게 대했을지도 모른다.
요즘 이태리는 몹시 비가 많이 오고 뼛속까지 한기가 스며드는 게 흡사 런던 날씨 같다. 사실 나는 수 차례 런던을 방문하면서 한 번도 악명 높은 런던 날씨를 겪은 적 없기 때문에 이 날씨를 사람들이 종종 묘사하는 런던 겨울 날씨라고 생각하게 됐다. 이탈리아를 여름에 방문한 적이 많은 나에게 로마는 해가 너무 쨍쨍하고 덥지만 건조해서 젤라또를 먹거나 그늘에 있으면 금방 땀이 식는 그런 곳이었다. 또 지난 2012년 로마를 방문했을 때에는 2월 말이었는데, 추운 서유럽에 있다가 넘어온 로마는 완연한 봄이어서 입고 있던 코트를 겸연쩍게 벗어 들고 다녔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올해 1월의 로마는 진짜 비가 많이 오고(2주째다) 생각보다 추워서 조금 괴롭다. 게다가 비만 오면 코블 스톤 바닥이 미끄러워져 넘어질 뻔한 적도 많다. 하지만 해가 질 때쯤 비가 그치면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다. 하얀 대리석을 깎아 만든 로마의 건축물 위로 분홍색 석양이 스며들면 누군가가 하얀 물감 위에 옅은 핑크색 물감을 떨어뜨린 것 같은 모양으로 천천히 물들기 시작한다.
이제 다시 먹을 궁리를 하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