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블제이 Feb 27. 2019

부엌이 없는 삶을 사는 자의 비애

로마, 2019년 2월 2일

로마의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맛있는 식재료를 눈 앞에 두고 요리를 할 수 없다는 건 여행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밥 보다 파스타를 더 많이 만든 나에게 있어 곤욕이다. 특히 내가 만든 로만 까르보나라는 한 번도 노 사인을 받아본 적 없으며 누군가의 집에 초대받았을 때에 답례로 내놓을 수 있는 자신 있는 요리 중 하나이기도 하다. 또 몸이 피곤하고 귀찮으면 대충 소시지를 볶아 시판 소스를 붓고 파스타를 넣어 라면만큼 빨리 볶아낸 파스타로 허기를 채우는 경우도 많았다. 이쯤 되면 파스타 만들기는 생존 전략이자 취미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혹시 까르보나라 레시피가 궁금하신 분은 링크 https://youtu.be/3AAdKl1UYZs 참조)


우리가 지내고 있는 이 에어비앤비는 바티칸에서 10분 내지 15분 거리에 있다는 지리적 이점에도 불구하고 한 달 가격이 530불이었다. 땡잡았다는 생각으로 덥석 예약을 해두었고, 유럽에 들어오기 전 시카고에서 이 방에 대한 정보를 찬찬히 살펴보다가 유틸리티 섹션에 부엌이 찍 그어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부엌이 없다니! 설상가상으로 끝까지 뒤진 리뷰 중 하나는 냉장고도 사용할 수 없다고 적혀 있었다. 그렇다는 건 요거트와 그래놀라/뮤슬리 같은 간단한 아침 식사도 먹을 수 없다는 이야기고, 전자렌지가 없으니 레토로트를 사 먹을 수도 없고, 오로지 레스토랑에 가서 밥을 먹거나 쿠키나 빵 같은 간단한 것으로 때워야 한다는 것이다. 케틀이 없다면 커피나 차도 마실 수 없다!


로마에 도착하고 방을 안내받으니 다행히 케틀은 보였다. 커다란 창에 널찍한 침대, 인 슈트로 딸린 화장실, 완벽한 난방까지, 사실 방 자체는 무척 좋았다. 하지만 밥과의 싸움은 우리를 창의력의 끝판왕으로 만들어주었다. 정말 슬픈 건, 동네에 있는 대형 마트만 가도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길쭉한 이태리 토마토와 가격별, 종류별로 정돈되어 있는 프로슈또, 갖가지 소시지가 즐비하고,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어려운 치즈 섹션이 따로 준비되어 있으며, 프리미엄을 붙여 파는 이태리산 익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도 정말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로마의 아시아 인구가 제법 되다 보니 떼르미니를 중심으로 한국 슈퍼마켓도 많아서 질 좋은 이태리 돼지고기로 제육볶음을 할 수도 있고, 진짜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다짐한다면 수육 한 판 정도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부엌이 없다...


이리하여 '동네 레스토랑 격파'의 나날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마트에서 사 온 빵과 잼, 쿠키, 차와 커피로 아침을 대충 때우며 일을 하다가 한시쯤 되면 밖을 나가 파스타나 피자 같은 간단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다행히 집 근처에는 흥미로운 식당이 다수 포진해있었다.


첫 번째로 찾은 레스토랑은 사실 발품을 팔아 찾은 것은 아니고 트립어드바이저를 뒤지다가 'cheap and delicious', 'best pasta in Rome'이라는 리뷰가 공존하는 레스토랑을 발견한 것이 시초였다. 주변 레스토랑 랭킹 1위인데도 디시당 가격이 6유로라니? 게다가 걸어서 5분 거리! 당연한 절차처럼, 도착한 첫날 저녁은 이곳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마지막 로마 여행이 2012년이었던 만큼 음식에 대한 기억도 흐려져 사실 그 기대치가 낮아졌던 것이 사실인데('나도 한 파스타 하는데 굳이 로마에서 먹어야 하나'라는 식의 오만) 이 기대치가 다시 높아지게 된 것은 100퍼센트 이 가게 덕분이었다. 우선 이 집은 파스타를 만드는 집이다. 손님의 30퍼센트가 파스타 디시를 먹으러 오는 사람들이라면, 70퍼센트는 면을 사러 온다. 따라서 면이 좋을 수밖에 없고, 면 전문가들인 만큼 알단테 하나만큼은 정말 끝장난다. 사실 부재료는 거의 없다시피 하여 아주 잘게 썰은 판체타를 바삭하게 볶아내어 소스에 섞어주는 것이 전부이다. 하지만 엄청난 파스타+맛있는 소스의 조합+가격 6유로+영어 가능한 주인아저씨의 조합은 우리를 단골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특히 이 집의 아마트리치아나는... 신선한 페코리노 치즈를 가득 얹어 주는 데다가 새콤달콤한 토마토소스에 판체타가 들어있다. 또 한국 음식이 그립지만 떼르미니까지 가기가 귀찮을 때에는 아라비아따를 시키면 어느 정도 욕구 충족이 되었다.


여기 보이는 저 떡볶이 같이 생긴 물체가 파스타이다. 맛도 얼추 토마토 떡볶이 맛... 소스는 아라비아따.


두 번째로 찾은 레스토랑은 피자집이다. 이 가게 역시 트립어드바이저(이게 없었다면 우리는 여행 전반에 걸쳐 돈을 아주 많이 낭비했을 것이다)로 찾았다. 이 집의 특징은 진열장 가득 아직 굽지 않은 피자가 가득하고, 피자당 가격은 조금씩 다르지만 평균 4.5 유로이다. 원하는 피자를 고르면 아저씨가 바로 화덕에 넣어 구워준다. 맛은 정말 환상적이다. 일단 갓 구워낸 피자인 데다가, 신선한 재료가 듬뿍 올라갔고, 피자의 꽃인 소스가 정말 맛있다... 단점이라면 장소가 협소해 앉아서 먹고 오기가 힘들다는 점인데, 사실 피자 맛에 비하면 이건 단점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피자는 페스토 소스에 치즈와 토마토가 듬뿍 올라간 애랑 프로슈또에 치즈, 견과류가 잔뜩 올라간 애 이렇게 두 종류다(추가 - 점심으로 다시 다녀왔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노란 소스를 바르고 아주아주 얇은 프로슈또를 잔뜩 깔고 꼬리꼬리한 치즈를 얹은 녀석이 제일 맛있다. 어쩌면 그냥 매번 고르는 것마다 다 맛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건 무려 시내까지 나가서 먹은 커팅 보드와 파니니. 최고의 파니니였다. 커팅 보드는 일인당 5유로. 사진은 2인분


그러나 진짜 이태리 경험이 시작된 건 아페르티보를 만나고 나서다. 사실 커피를 마시러 갈 때마다 커피숍 겸 델리(?)에 엄청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무언가를 먹고 있길래 저 사람들은 대체 뭘 저렇게 먹나 궁금했는데, 저녁에만 있는 줄 알았던 아페르티보가 점심에도 있었던 것이다. 가격은 7.5유로부터 10유로, 13유로까지 천차만별인데, 아무래도 사람들과 소통하지 않으면 가격은 얼마인 지부터 시작해서 어떤 요리인지까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이를 시도하는 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알려준 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갔을 때 식당 스태프들이 바쁘게 런치 아페르티보를 준비하는 것을 보고 혹시나 했는데, 다행히 영어를 하는 스태프가 있어서 가격(9유로)과 어떻게 작동하는지(애피타이저 류는 자유롭게 먹으면 되고, 피자가 곧 준비될 것이며, 파스타와 고기 종류는 스태프에게 요청하면 준다)를 알 수 있었다. 맛있는 토마토소스 뇨끼와 두툼한 소고기, 찐 야채 등등으로 배를 통통 채우고 나니 9유로라는 가격이 새삼 싸게 느껴진다. 사실 한국 돈으로 치면 만원이 넘는 가격이라 점심 비용으로 지불했다면 조금 비싸다고 느낄 수 있지만... 이곳에서 10유로 이하로 배를 채운다는 건 엄청나게 드문 일이고, 물을 주문하는 데도 돈이 들고 와인 한 잔 곁들이지 않으면 자린고비처럼 느껴지는 시스템에서 아페르티보는 정말 알차기 그지없는 것이다.


피자 파스타가 질려 리조또를 시켜보았다. 동네 시푸드 레스토랑. 엄청 꽉 찬 맛이다


이렇게 점심을 먹고 나와 0.9유로짜리 에스프레소 한잔으로 입가심을 한다. 처음에는 '에.. 어.. 원 에스프레소 플리스?' 하던 것이 이제는 '우나 카페 페르 파보레'로 착착 붙어 나오는 요즘, 새삼 시간이 훌쩍 흘렀음을 체감한다. 이제 로마에서의 시간도 딱 일주일 남았다. 다음 목적지는 아테네다.






  



요리


로마


여행



매거진의 이전글 여행을 하며 요가를 수련한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